평택임씨(平澤林氏) 갑자보(甲子譜 1804年) 서문(序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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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93회 작성일 23-10-11 02:57본문
평택임씨(平澤林氏) 갑자보(甲子譜 1804年) 서문(序文)
族譜를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계와 파의 아름다운 일들을 기록하는 것은 마음대로 각색하면 안되며 금석학을 믿고 맡겨야 합니다.
우리 집안은 오래도록 족보가 없었으나 이전 甲申年에 초안을 마련하기 시작한 이후로 지금까지 40여 계절을 거슬러 올라간 을병壬戌年 봄에 서울에 거주하는 宗親 영회가 책을 다시 발행하는 글을 각 읍에 보내서 각 족보의 파와 고향 및 거주하는 宗親을 기록한 단자를 거두어 들였고 재종질 영택이 그 일을 맡아 비용을 전달하 였습니다. 族譜라는 일이 틀린 것을 바로 잡는 일이 많은 고로 그것을 공주의 갑사로 옮겨서 종친인 영창,영태와 함께 구 族譜를 근거로 이어서 정리하였습니다.
대대를 기록한 족보를 고증해서 사사로운 것을 없애고 사실이 아닌 것을 바로잡고,분양왕(곽자의)의 거짓을 따로 떼어내는 일은 참으로 무성한 초목의 가지들을 하나로 합치는 것과 같이 중요한 일이랍니다.
지금까지 林家姓을 가지고 의철, 서원을 이름으로 하는 가짜 족보 사건에 대해 족보를 불태워서 죄를 바로잡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그로 인한 林氏 家門이 입은 굴욕은 이미 말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林氏 家門의 族譜 수정을 한층 더 조심하고 신중하게 처리해야 했습니다. 고려시대 우리 가문의 파인 忠貞公의 윗대는 문헌이 부족한 고로 감히 글의 서문에 쓸 수 없었고 그 이후의 소목(신주를 모시는 차례)은 분명히 하였습니다.
하지만 기입되어야 할 지파가 빠졌다며 林氏라 칭하는 사람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습니다. 새로운 족보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있을 것이나 제반 호적 또는 남아있는 것들을 가려내고 의혹을 파헤쳐서 많은 부분을 골라냈으므로 믿음직하고 착실하며 같은 뿌리를 가진 친족들의 우의와 화목함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가을 7월에 葛谷(임수겸의 호)과 忠愍公(임경업)의 파는 學士公의 후예와 함께 여러 代동안 그 근거가 없었던 관계로 구보에 이 내용을 기록하지 못했는데 선배님들께서 애석히 여기시는 바,이에 남겨진 족보에 고고학적 고증을 하여 옆에 추가하였는데, 忠貞公의 자손들이 이 일을 모를 수가 없었으므로 일이 커지고 갈등이 발생한 데다가 재정적인 부족문제까지 야기되어 또다시 순조롭게 기록하지 못하게 되어 이 또한 아쉬웠습니다.
그 외에도 집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것이 유실되어 族譜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소중히 생각해서 부디 후대 사람이 널리 생각하여 크게 새기기를 바랍니다. 수정한 족보의 본말은 저의 아버지와 아저씨인 화씨가 사실상 경영하면서 뜻을 주셨고,돌아가신 다음에는 재종형인 덕원씨가 마침내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영택이 계속 오늘날까지 수정을 하였으니 어찌 한 집안의 커다란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이 일을 마친 후에 이전에 느꼈던 마음을 서술합니다.
숭정년 기원 후 세 번째 甲子年의 가을 7월 하순에 자손 진원이 삼가 서문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