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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및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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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 및 제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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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18회 작성일 23-10-11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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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팽성백 임공팔급제단비----족보 1

  

2) 충정공(忠貞公 언수(彦脩묘비문(墓碑文

 

의 성()은 임씨(林氏)이름은 언수(彦脩)는 국경(國擎)는 계헌(桂軒)이며 관향(貫鄕)이 평택(平澤)이다.

고려(高麗충렬왕조(忠烈王朝甲午年(1294) 出生하였다.

丁未(1307) 사마문과시(司馬文科試)에 합격하여 관직이 금은자광록대부(金銀紫光錄大夫대광영찬성(大匡領贊成문하시중(門下侍中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렸다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하고 시호(諡號)는 충정공(忠貞公)이다명나라 홍무(洪武) 17(1384) 고려(高麗폐왕(廢王신우(辛禑甲子年(1384)에 돌아가셨다() 91세였다.

태당연당(太唐速堂학사공(學士公()을 시조로 하여 여러 대를 이어 왔는데 팽성(彭城한림학사(翰林學士)이고 시호(諡號)가 충절공(忠節公)인 팔급(八及)이 그의 11代祖이시다.

충절공(忠節公)은 큰 아들 태사상장군(太師上將軍)이시고 시호(諡號)가 충렬공(忠烈公)이신 양저(良貯)를 낳으시고 충무공(忠武公)은 상장군(上將軍)이시고 시호(諡號)가 충렬공(忠烈公)이신 무()를 낳으시고 충렬공(忠烈公)은 영삼사(領三司평성백(平城伯)이시고 시호(諡號)가 충숙공(忠肅公)이신 희()를 낳으시고 충숙공(忠肅公)은 평장사(平章事)이신 면()을 낳으시고 평장사공(平章事公)은 시금위(侍禁衛)이신 득우(得雨)를 낳으시고 시금위공(侍禁衛公)은 평찰품사(評察稟事)이신 몽주(夢周)를 낳으시고 평찰품사공(評察稟事公)은 통학권장(統學勸長)이 신 희윤(喜胤)을 낳으시고 권장공(勸長公)은 평장사(平章事)이신 연()을 낳으시고 평장사공(平章事公)은 문하시중랑(門下待中郞)이신 정()을 낳으시고 시중낭공(侍中郞公)은 좌찬성(左贊成)이신 완()을 낳으시니 언수공(彦脩公)의 아버지이시다어머니는 이조전서(吏曹典書)이신 광산(光山김황(金煌)의 따님이시다.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김포공씨(金浦公氏)인데 문하평리사(門下評理事이신 공휴기(公閑奇)의 따님이다.

계부인(繼夫人)은 정경부인(貞敬夫人여산송씨(礪山宋氏)인데 평장사(平章事)이신 송침(宋深)의 따님이시다성산(星山지금의 성주성(星州城동쪽 교하(交河지금의 항남면(航南面고양리(古襄里지금의 신부동(新扶洞)에 경좌(度坐)로 세 분의 가 있다아들 다섯 분을 두셨는데 큰 아들은 좌찬성(左贊成)이신 충간공(忠簡公성미(成味)이고 둘째 아들은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이신 견미(堅味)이고 셋째 아들은 관산군(冠山君)이신 제미(齊味)이고 넷째 아들은 이부상서(吏部尙書좌복야(左僕射)인 조양군(北陽君세미(世味)이고 다섯째 아들은 선산군(善山君)이고 시호(諡號)는 문정공(文靖公)인 의미(毅味)이시다이들 세미(世味)가 삼가 기록(記錄)합니다.

지석문과 비문이 서로 부합되기 때문에 따로 따로 글을 짓지 아니한다.

丁卯年(1387) 세미(世味

 

3) 충정공(忠貞公이하 3 제단비(祭壇碑

 

임자약보(壬子略譜완역(完役후 종의(宗議)와 제종친(諸宗親)의 헌성(獻誠)에 의하여 우리의 1세조(世祖충정공(忠貞公 언수(彦脩) 2세조(世祖충간공(忠簡公 성미(成味) 3세조(世祖상장군(上將軍 상양(尙陽)과 참판공  길양(吉陽) 3 8의 제단(祭壇)에 세워져 있는 비()이다.

 

4) 직장공(直長公 (묘지(墓誌

 

 는 첨()이다()는 절충장군지훈련관사(折衝將軍知訓鍊觀事 상양(尙陽)이요는 광정대부 삼사우사상호군(匡靖大夫 三司右使上護軍)으로 시호(諡號)가 충간공(忠簡公 성미(成味)증조(曾祖)는 벽상삼한삼중대광평성부원군(壁上三韓三重 大匡平城府院君)으로 시호(諡號)가 충정공(忠貞公)인 언수(彦脩)였다.

()는 숙부인(淑夫人장씨(張氏)니 가선(嘉善)으로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였던 연()의 따님이요아내는 나씨(羅氏)니 봉훈랑(奉訓郞)으로 도강감무(道康監務)였던 설()의 따님이었으며 중현대부(中顯大夫)로 전농정(典農正)이었던 공언(公彦)의 손()이요가선(嘉善)으로 공조전서(工曹典書)였던 진()의 증손(曾孫)이며 지서원군사(知瑞原郡事)였던 정연(鄭淵)의 외손(外孫)이었다영락계묘(永樂癸卯서기(西紀) 1423 겨울에 나씨(羅氏)가 몰()하니 나주(羅州고을에서 서쪽으로 七里에 있는 남()쪽을 향()한 언덕에 장사(葬事지냈다. 21녀를 두었으니 큰 아들 효손(孝孫)은 사세(四歲)둘째 종직(從直)은 삼세(三歲)딸은 태어나 돌이 못된 때였는데 오래지 않아 이 서거(逝去)하니 이곳에 묘소(墓所)를 전후분(前後境)으로 하여 모셨다.

(): 配位는 임자(壬子)서기(西紀) 1972 의 묘에 합병했다.

도강감무(道康監務)였던 분은 아들은 없고 따님 하나뿐이어서 세 영아(嬰兒)들을 안아서 길러 장가 보내고 시집 보냈다.

효손(孝孫)은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가동(可棟)이요가동(可棟)의 아들은 생원(生圓)이던 균()이며 균()의 아들은 경윤(慶潤)이었다.

종직(從直)은 무관(武科)에 등제(登第)하여 벼슬이 수군우후(水軍處侯)에 이르고 두 아들을 두었으니 백근(百根)은 임피현령(臨陂縣令)이었고 만근(萬根)은 평양서윤(平壤庶尹)이었다.

백근(百根)의 아들인 주()는 내금위(內禁衛)였으며 휴() 진사(進士)였고 사위는 윤광형(尹光衡)이었다.

만근(萬根)의 아들인 비()는 참봉(參奉)이요()는 충청도사(忠淸都事)였고 준()은 선전관(宣傳官)이며 사위에 한 사람은 이희옹(李希雍)이니 백천군수(白川郡守)였고 다음은 신광한(申光漢)이니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었다.

딸은 한장손(韓長孫)에게 시집갔으니 그 분은 중추원사(中樞院事서룡(瑞龍)의 큰 아들로서 벼슬은 내자시정(內資寺正)에 이르고 두 아들을 두었으니 한 분은 증()이니 사 도시정(司䆃寺正)을 역임(歷任)하였고 둘째는 순()이니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역임(歷任하였다.

()의 아들에 효원(效元)은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이었고 효건(효건)은 충무위사과(忠武衛司果)였다.

딸 여섯 사람은 모두 시집가서 사대부(士大夫)의 아내가 되었다.

이분들 효원(效元형제(兄弟)에 이르러 그들의 어버이를 같은 묘역(墓域)에 장사(葬事지내고 짧다란 비갈(碑碣)을 세우고 또 상석(床石)을 놓았다.

도강감무공(道康監務公)의 묘소(墓所)가 북쪽으로 二里의 거리(距離)에 있었는데 묘표(墓表)만 있고 상석(上石)이 없다.

역시(赤是 상석(上石)을 놓았으니 선지(先志)를 따른 거였다고 말했었다.

오호라은 어려서 나씨문중(羅氏門中)에 의탁(依託)하였으나 부부(夫婦)가 일찍 별세(別世)하고 어린 아이들만 있었는데 구십여년(九十餘年)만에 묘예(苗裔)들이 참으로 번성(繁盛)하였으니 적선(積善)에 대()한 보답(報答)이 아니겠는가.

임씨(林氏)는 평택(平澤)의 대성(大姓)으로 수백년(數百年)동안 높은 벼슬을 역임(歷任)했던 세가(世家)였다.

의 몸에 이르러서 나이가 넉넉하게 살지를 못했고 벼슬이 높지 못했으나 쌓아진 덕()은 반드시 나타나서 그러한 발단(發端)에서 큰 결과(結果)가 나와 후인(後人)을 성취(成就)케 했음을 의심(疑心)치 않으니 그저 이런 정도(程道)에 그치겠는가모든 우리의 오늘이 있음은 근본(根本)이 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파계(派系)를 각()하여 기리 내려가도록 하노라.

皇明正德 十年 乙亥 弘文典翰 韓效元撰

 

 

5) 우후공(虞侯公 종직(종직묘갈명(墓碣銘)

 는 종직(從直)이며 그 원류(源流)는 평택임씨(平澤林氏)이니 아국(我國)의 대대(代代)로 세세명망가(世世名望家)이다.

고조(高祖) 는 언수(彦脩)이니 벽상삼한삼중대광평성부원군(壁上三韓三重大匡平城府院君)으로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며 증조(曾祖) 는 성미(成味)이니 삼사우사 상호군(三司右使上護軍)으로 시호(諡號)는 충간(忠簡)이며 할아버지의 는 상양(尙陽이니 절충장군훈련관사(折衝將軍訓練觀事)이며 아버지의  ()이니 사복시정(司僕侍正)으로 행직(行職)은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이다.

직장공(直長公)이 경기송현(京畿松峴)에서 나주(羅州)로 이주(移住)해 왔으니 향인(鄕人)들이 송현댁(松峴宅)이라고 부르다가 마침내 촌명(村名)이 되었다.

어머니 숙부인(淑夫人)은 나주나씨(羅州羅氏)이니 도강감무설(道康監務設)의 무남독녀(無男獨女)였다공의 집에 시집와서 온건(穩健)히 부도(婦道)를 지켜 내치(內治)의 미덕(美德)을 이루었으니 모두들 여중군자(女中君子)라고 허여(許與)했다.

이 세종삼년신축(世宗三年辛丑서기 1421에 탄생(誕生)하여 겨우 세 살에 어머니가 별세(別世)하고 익년(翌年)에 직장공(直長公)이 이어 돌아가시자 적막(寂寞)한 집안에 단지 강보에 싸인 세 어린애만 남았다.

의 형 효손(孝孫)은 네 살이었고 의 여동생은 돌도 아직 넘지 않았다도강공(道康 公)이 삼남매(三男妹)를 포육(抱育)하기를 자기(自己소생(所生)과 다름없이 하여 잠시도 마음에서 잊지를 아니하여 다행(多幸)히 잘 자라서 다같이 성취(成就)하게 되었다.

이 어려서 무과(武科)에 등과(登科)하여 벼슬이 충청수군우후(忠淸水軍虞侯)에 이르렀고 졸후(卒後)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아내 숙부인(淑夫人계림김씨(鷄林金氏)는 제용감(濟用監부녹사(副錄事효행(孝行)의 따님이다자상온량(慈詳溫良)하고 성심(誠心)으로 일을 처리(處理)하여 능()히 창대(昌大)한 터전을 만들만한 분이었다.

과 숙부인(淑夫人) 한 해는 상세(詳細)히 알지 못하나 는 흥룡동(興龍洞선영(先塋아래 자좌오향(子坐午向)에 쌍조(雙北)이다.

두 아들이 있었으니 백근(百根)은 벼슬이 임피(臨陂)와 진위(振威두 고을의 원을 지내 셨고 만근(萬根)은 평양서윤이조참판(平壞庶尹吏曹參判)이셨다.

손자(孫子)와 증손(曾孫중에 붉은 조복(朝服)입고 노란 띠를 띠었던 현작(顯爵)과 화락(和樂)한 용봉(龍鳳)같은 후예(後裔)들은 손가락으로 헤아리지 못하여 번성(繁盛)한 나라 안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오호라이 어렸을 적에 가운(家運)의 간난(艱難)이 그야말로 위태위태(危殆危殆)했었다만약 도강공(道康公)이 돌보아 구제(救濟)하여 온전(穩全)하게 길러준 힘이 없었다면 또한 구르고 굴러 어떤 지경에 이르렀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누세(累世적선(積善)의 남은 음덕(蔭德)이 남 모르는 가운데 끊이지 아니하고 하늘의 도음과 신()의 보호(保護)가 다시 의 전후(前後)에 더하여 찬란(燦爛)하고 창대(昌大)한 후복(厚福)이 천재(千載)의 무궁(無窮)한 데까지 연면(延綿)하였으니 어찌 천도(天道)가 선인(善人)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믿지 않겠는가.

후손(後孫중필(中馝)이 나에게 찾아와 의 묘문(墓文)을 부탁(付託)하였다잠시 가장(家狀)을 근거(根據)로 삼아 삼가 대요(大要)를 위와 같이 택()하고 이어서 명()을 하니 이르길 위태(危殆)로운 후()에 편안(便安)하니 능()히 큰 도모(圖謀)를 펼 수 있었고 마음에 뜻을 두면 반드시 이루니 천추(千秋)에 번무(繁茂)하리라.

광복후 기미 십월 일(光復後 己未 十月 日)

김해후인 김헌태 근찬병서(金海后人 金憲泰 謹撰並書

 

 

6) 참판공(參判公 만근(萬根묘지(墓誌)

 

 는 만근(萬根)이며 는 불발이고 조상이 평택 사람입니다.

오대조 언수는 고려 말 벼슬을 하셔서 평성부원군에 책봉되었으며 아들 성미는 광정대부와 삼사우사상호군을 하셨고 그의 아들 상양은 조선에 입조하여 절충장 군지훈련관사를 지내셨습니다.

공의 증조부는 사온서 직장을 하신 첨으로 나주나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셨으며 나주에서 임종하시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의 아드님은 휘가 종직이며 무과에 급제하셔서 수군 우후가 되셨고 예빈시 첨정 김효행의 여식을 맞이하여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은 그 중 막내였습니다.

글을 적게 읽고 과거에 응시하여 낙방하자 조상의 이름으로 관리에 등록하였고 사온서 주부사헌부감찰을 역임하였고 외부로는 목천현감함흥부판관으로 지내시고 돌아오셔서 사도시 첨정 선공감 첨정을 하신 다음 다시 외부로 나가셔서 평양부 서윤을 하시다가 다 마치시지 못하시고 병으로 인해 사임하신 후 귀향하셨다가 다시 의성 현령으로 입조하시고 선공감 첨정을 하셨으며 다시 나가셔서 임천군수를 하시다가 상피(친족관계나 기타 관계로 같은 부서 근무가 허용되지 않음)로 인해 금산군수로 변경되셨습니다.

가정4년 을유년 봄 금산군수 임기를 마치시고 예빈시 첨정의 임기가 다 되지도 않아서 병으로 그 해 3 24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7세셨습니다.

공은 기량이 폭넓고 빈틈이 없으며 활달하고 친구와 어울려서 배움이 많았습니다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능력이 두드러져서 모두 10여 차례의 내근직과 외근직를 역임하셨고 업무를 늦추거나 지체하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배우자는 숙인 정씨로 고려 문하찬성이셨던 신호의 후예이며 운봉현감 의충의 자손인 고성군수 절의 딸이며 자녀를 낳기 위해 복을 받도록 규문에서 법도를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고 공을 따라 군산에 갔다가 4년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는 사성(士成)이다.

명종(明宗) 1(1546) 병오(丙午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여 진사에 발탁되고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이어 청양현감(靑陽縣監)을 역임하였다.

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參贊官)을 증직(贈職받았으며 청양(靑陽)에 선정비(善政碑)가 남아있다.

配位는 숙부인(淑夫人전의이씨(全義李氏)이며 1582(선조15) 하였다.

 (), (), ()

 

 

7) 송파행적(松坡行蹟

 

영의정 평릉부원군을 추증 받으신 임공은 가 식()이고 는 숙무이며 호는 송파로 금호공의 조카였습니다.

금호의 아우는 정수라고 하며 좌승지를 추증받은 형조좌랑이었습니다.

좌랑공은 전의 이씨 현감 진남의 딸을 맞이하였고 공을 낳았습니다.

가정 기해년 9월 공이 태어났으며 공은 나실 때부터 영민하시어 일찍이 시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갑자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율곡 선생 이름이 붙은 방의 2등이었습니다.

임신년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심충겸이 장원한 방에서 4등을 했습니다.

여름에 관직을 분배할 때 승문원가을에 권지정 자리를 받았으며 계유년 겨울 호송관으로 영남으로 가서 갑술년에 주서로 단계가 올랐고 을해년 겨울 특별히 육품 사복시 주부를 받았습니다.

갑자기 공조좌랑으로 옮긴 다음 병자년 가을에 전라 우도 마필 점고직의 임기를 마치기 전에 조정으로 돌아와서 병조좌랑을정축년 봄에 성균전적여름에 다시 병조좌랑무인년 봄에 전라도 순무어사를 하고 조정에 돌아와서 병조정랑을 하고 충청 좌도 경차관의 임기를 마치기 전에 조정으로 돌아와서 해운판관기묘년에 예조정랑을 이어서 제수 받았으며 임기 만료 전에 영변판관으로 외지로 나갔습니다.

의 재주와 행적이 뛰어났고 가장 바른 지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대부분의 간신 무리들이 그를 시기해서 변방으로 내쫓았고 늘 청현(중앙 고위 관직)의 언로를 얻지 못하였습니다경진년과 신사년에 영변에 있었으며 임오년에 오셔서 청양현에서 뵈었는데 2월에 이 부인이 상을 당하여 나주에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승지공께서 번갈아 서울 집에 들리셨는데 계미년에 병환이 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길에 올라 금강에 도착하였는데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나주의 선영에 장례를 모셨습니다.

을유년에 상을 마치고 바로 형조좌랑을 제수받았으며 입경하기도 전에 평안도사로 가는 발령을 받았지만 상피제로 인하여 수일이 지나서 구성부사를 제수 받았습니다.

병술년 구성을 잘 다스려서 강계 부사직을 받았는데 그를 질투한 간신들로 인해 그만두고 결성으로 돌아와서 이때부터 관직에 뜻을 두지 않으셨으며 부해정에 기거하면서 호를 송파거사라고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참의직을 제수하면서 불렀으나 결국 가지 않고 시로 말했습니다.

지란이 물가에서 헛되이 늙어가는데 봄 새는 다정하게 만곡에서 우는구나십리나 되는 풍우가 험한데 외로운 배는 저물어가는 만조에 쓸쓸하게 옆으로 누워 있네.” 이 절구를 보면 공의 뜻과 행실이 고결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업신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율곡 선생이 사마 시험의 방에 붙을 때 같이 붙었던 17명의 현자가 모두 방의 순서에서

_ _ _ _ 성적이 못함)에 자리하였으니 그 당시의 도덕적인 명망의 뛰어남과 굳은 절개가 어떠했는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공의 조카 죽계공이 공의 부인인 유씨의 비석문을 지으면서 공이 재능으로써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고 말했으며 서하 이공(이민서)는 편찬한 금호 행적기에서 그 조카 송파 관해 형제는 모두 기개와 절개로 유명했다고 했습니다.

청음 김 선생(김상헌)은 그가 편찬한 금의주의 여물비문에서 “교류한 사람들은 모두 당대의 으뜸가는 선비들인데 서의주 익과 구성의 임식이 가장 서로 잘 맞았다고 하셨습니다.

고결하고 정직하시며 남을 잘 인정하지 않으시는 청음 김상헌께서 괴사(으뜸가는 선비)라는 말로 공을 칭찬하셨습니다.

공은 또한 현주 조위와 현강 한찬과 교류하였습니다.

한과는 우정이 마치 형제와 같았고 유송당 홍이 공의 비문을 쓸 때 “공은 문무를 겸비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동료로 일컬을 만한 사람이 적다"고 하셨습니다.

열거한 선현들이 칭찬하고 교류한 행적을 보면 공의 도덕과 행함에 대한 원칙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장곡합 선생도 문장이 탁월했지만 그가 오히려 공이 시문을 잘 써서 세상을 울렸다고 칭할 정도였습니다.

애석하게도 그 시문이 대부분 임진년과 계유년의 화로 인해 없어지고 겨우 몇 가지 문장을 들어서 전해오는 것을 제현의 문집에서 수집하였습니다.

무자년 겨울 추위로 질병을 얻으신 공은 기축년 정월 초 6일에 향년 51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첫째 부인은 해주 최씨 도수 제운의 여식문헌공 충의 후손을 맞이하였고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장남은 득인으로 주부차남은 득의로 절도사를 지냈고 이몽학의 난을 토벌하여 청난공신에 기록되어서 공은 영의정에 추증 되었습니다.

둘째 부인은 창원 유씨 참판 필의의 여식으로 보문각 제학 경의 후예를 맞이하여 4 3녀를 낳았고 첫째는 득례둘째는 득지셋째는 득신으로 진사넷째는 득제였으며 장녀는 관찰사 임서차녀는 진사 임집셋째는 김탕에게 시집을 보냈습니다.

은 삼백년 벼슬하는 가문에서(태어나약관 때부터 재주가 앞설 사람이 없었으며 관복을 18년간 입었고 벼슬이 3품으로 끝나셨습니다.

하늘이여운명이여공의 백부인 금호공이 정언각의 무고로 정미년에 벽서참화라는 사화를 당하셨고막내 동생인 관해공께서는 광주 목사로 계시다가 역적 이괄의 흉봉에 순절하시니 삼부자의 행적과 의지 및 절개는 전대와 후세에 아름답게 보여지며 천년동안 부끄러움이 없겠습니다.

의 여덟 아들과 9명의 손자가 모두 공신 명록에 실렸습니다.

관해행적 문곡 김수항 찬

평성군파 담양문중 25세 임동규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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