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고찰

평택임씨 충정공계 직계 조상편

평택임씨 충정공계 직계 조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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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평택임씨의 충정공계(향선재) 직계 조상과 행적

평택임씨 충정공계가 나주로 입성하여 향선재 대종회가 된 내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평택임씨 향선재(享先齋) 祭享 先祖


1) 1世祖 충정공(忠貞公) 諱 언수(彦脩)
고려(高麗)말 중시조(中始祖) 충정공(忠貞公)의 호(號)는 계헌(桂軒)이며 휘(諱)는 언수(彦脩 1294~1384)이고 1307年에 사마문과시(司馬文科試)에 합격하여 관직이 금은자광록대부(金銀紫光祿大夫) 대광령찬성(大匡領贊成) 문하시중(門下待中)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고 아들 견미의 유공(有功)으로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封)해졌고 시호(諡號)는 충정공(忠貞公)이다. 무진화변 이전(1388년)인 고려 우왕(禑王) 신우(辛隅) 甲子年(1384)에 졸(卒)하여 큰 피해를 보지 않아 계대 할 수 있었다. 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김포공씨(金浦公氏)이고 문하평리사(門下評理事) 공휴기(公閑奇)의 따님이다. 두 번째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 여산송씨(礪山宋氏)로 평장사(平章事) 송침(宋深)의 따님이다.
묘는 성산(星山) 지금의 성주성(星州城) 동쪽 교하(交河) 지금의 항남면(航南面) 고양리(古襄里) 지금의 신부동(新扶洞)에 경좌(庚坐)로 세 분의 묘가 있다고 신도비에 기록되어 있으나 실전(失傳)되어 서기 1972년 10월에 나주시 송월동 향선재 영역(瑩域)에 단을 쌓고 비(碑)를 세워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시제로 향사(享祀)하고 있다. 公의 아들들인 6미손(味孫)은 충간공(忠簡公) 諱 성미(成味 〜1383),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 諱 견미(堅味 〜1388),판윤공(判尹公) 諱 제미(齊味 〜1388), 조양군(兆陽君) 諱 세미(世味), 시진군(市津君) 諱 자미(自味),선산군(善山君) 諱 의미(毅味) 형제분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여 가문(家門)을 빛내었으나 무진화변으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였다.

子 성미(成味),견미(堅味), 제미(齊味). 세미(世味), 자미(自味),의미(毅味)

2) 2世祖 충간공(忠簡公) 諱 성미(成味 ~1383)
公의 諱는 성미(成味)고 시호(諡號)는 충간공(忠簡公)이며 충정공(忠貞公)의 1子 이다. 고려 말엽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광정대부 문하시중 동평장사 삼사우사 상호군(壁上三韓 三重大匡 匡靖大夫 門下侍中 同平章事 三司右使 上護軍)을 역임하고 1378年 우왕(禑王 재위 1365〜1389) 4年 밀직부사로서 서경도 순문사(西京都 巡問使)가 되었다. 1380年에는 진포(鎭浦)에 침입하여 각지를 횡행하면서 만행을 저지르던 왜구가 선주(善州: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에 모여들자 사근내역에 지방의 원수들이 집결하고 왜구와 싸우려고 하던 도중 고려 조정에서 우왕(禑王)이 이성계를 양광 전라 경상 3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밀직(密直) 임성미(林成味 〜1383) 찬성사(贊成事) 변안열(邊安烈 〜1390) 평리(評理) 왕복명(王福命)과 평리(評理) 우인열(禹仁烈 1337~1403), 우사(右使) 도길부(都吉數 ~1388), 지문하(知門下) 박임종(朴林宗 〜1392),상의(商議) 홍인계(洪仁桂 1390), 척산군(陟山君) 이원계(李元桂 ~1388) 등 8명의 원수들이 이성계(李成桂 1335〜1408)와 함께 출전(出戰)하여 남원(南原) 운봉(雲峰)전투에서 왜구의 적장인 아지발도(阿尺拔都)를 사살(射殺)하고 5천여 명의 왜구를 전멸(全滅) 시키고 1380년 9월 황산대첩(荒山大捷)의 전과를 올리셨다. 1382年에는 왜구를 사칭한 양수척(楊水尺)들이 영해군에 침입하여 관아(官衙)와 민가를 불사르는 등 악행을 자행하므로, 판밀직(判密直)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 황보림(皇甫琳) 등과 함께 이를 무찌르고 잡혀갔던 남녀 50여 명과 말 200여 필을 찾아오는 등 무공(武功)을 세웠으며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역임(歷任)하고 시호(諡號)는 충간(忠簡)이다.  멸문지화(滅門之禍)을 당한 무진화변(戊辰禍變, 1388년) 이전인 1383년에 타계하여 자손은 피해 보지 않아 평택임씨 충정공계 계대(忠貞公系 系代)가 가능하였다. 配位는 장흥임씨(長興任氏)로 소부윤기의 따님이다. 묘는 경기도 장단면 두메리 원금곡에 간좌합조(良坐合兆)로 모셔져 있으며 매년 포천문중(抱川門中)에서 가을 묘제(墓祭)를 받들어 왔으나, 이곳은 남과 북이 대치하는 비무장 지대에 편입되어 성묘(省墓)의 길조차 막혀 1972년 10월에 전남 나주시 송월동 향선재 영역에 고위(考位) 충정공 설단(設檀)과 함께 고위단의 동편에 설단하고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시제로 향사를 받들고 있다.
子 상양(尙陽),길양(吉陽)


3) 3世祖 상장군(上將軍) 諱 상양(尙陽)
충정공(忠貞公) 諱 언수(彦脩)의 큰 손자이시고 충간공(忠簡公) 諱 성미(成味)의 첫째 아들로 조선(朝鮮) 초기에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 지훈련관사 상장군(折衝將軍 折衝將軍 知訓鍊觀事 上將軍)을 역임하였다. 公은 1412년(태종12년) 종3품인 대호군(大護軍)으로 풍주진 병마사(兵馬使)를 지내고 정3품인 상호군(上護軍-당상관 절충장군)에 오르고 훈련관사(訓鍊觀事)를 역임하였다. 公은 1419년(세종 1년)에 의정부 찬성사 이종무(李從茂) 종군 절제사 우박(禹博). 중군 절제사 박성양(朴成陽)과 서성(徐省), 이징석(李澄石) 등과 함께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출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울진장씨(蔚珍張氏)로 충청감사 연(演)의 따님이고 墓는 김천군 강음현 목감동 또는 장단곡에 있다는 설이 있으나 실전되어 나주 송월동 향선재 영역(瑩域)에 설단하여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시제로 향사를 받들고 있다.

子 첨(襜)


4) 4세조 직장공(直長公) 諱 첨(襜)
직장공(直長公)은 중시조 충정공(忠貞公)의 증손(曾孫)이시고 3세조 상장군(上將軍) 諱 상양(尙陽)의 아드님이다. 사온서 직장(司醞署 直長)을 역임하고 통훈대부 사복시정(通訓大夫 司僕寺正) 증직을 받았다. 配位는 나주나씨(羅州羅氏) 도강감무(道康監務) 나설(羅設)公의 따님이다 나씨(羅氏) 할머니께서 네 살과 세 살의 아들 형제분과 강보에 싸여있는 따님을 남기고 세종 5年(1423년) 1월 26일에 타계하니 公께서 어린 3남매를 데리고 경기도 송현에서 처가인 현재의 나주 송현으로 이거하여 마을 사람들이 송 현 양반으로 불렀다. 이로 인해 마을 지명이 송현으로 되었다고 한다. 이때 공께서 처음 나주(羅州)에 오셔서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어 직장공(直長公)을 입나주낙남선조(入羅州落南先祖)라고 부르며 향선재가 평택임씨의 중심이 되었다.  公께서는 불행하게 이주 이듬해인 1424년 10월 29일에 별세하여 墓를 송월동 우록(右麓) 자좌오향(子坐午向) 전후조로 모셨는데 서기 1972年 합조로 개장하고 석물을 갖추어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향선재 대종회에서 향사를 받들고 있다. 직장공의 묘는 향선재 묘역(享先齋 墓域)에서 실묘(墓)로는 최존위(最尊位)이다. 자(子)로는 효손(孝孫)과 종직(從直)이 있는데 부모인 직장공 내외께서 일찍 타계하시니 장인인 도강감무 나설 공께서 무남독녀 딸의 외손들을 키워 성장시켰으며 재산도 모두 증여해줘 오늘의 향선재 대종회의 위토가 되었다.

子 종직(從直)


5) 충정공계 5世祖 우후공(虞侯公) 諱 종직(從直)
우후공(處侯公)은 직장공(直長分) 첨(襜)의 2子로 諱는 종직(從直)이며 세종 신축(辛丑) 1421年에 출생(出生)하였고 1488年(乙酉) 3월 24일 향년(享年) 67세에 졸(卒)하였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충청도 수군 우후(忠淸道 水軍 虞侯)를 역임하고 정3품 당상관(堂上官) 통정대부 병조참의(通政大夫 兵曹參議)를 증직 받았다.  配位는 예빈시첨정(禮賓寺僉正) 김효행의 따님이다. 墓는 나주시 송월동 향선재 영역(享先齋 靈域)에 자좌 쌍조로 모셔져 있으며 시제는 음력 10월 15일에 향사(享祀)를 받들고 있다.

子 백근(百根), 만근(萬根)  


6-1) 충정공계 6世祖 진위공(振威公) 諱 백근(百根)
진위공(振威公)은 직장공(宣長分) 諱 첨(襜)의 손자이고 우후공의 종익(從直) 1子로 諱는 백근(百根)이고 2자인 만근(萬根)의 형이다. 세종 28년 1,446年 병인년(丙寅年)에 출생하여 중종 11年 병자 1516年 향년 70세에 卒하였다. 공은 처음에는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한 후 20여 년간 관직에 계셨으며 후에 임피 현령을 하시고 그 후 장악원 주부를 역임했다. 통정대부 병조참의(通政大夫 振威縣令)을 증직 받았다.

子 주(疇), 휴(畦)


6-2) 충정공계 6世祖 참판공(參判公) 諱 만근(萬根)
참판공(參判公)은 직장공(宣長分) 諱 첨(襜)의 손자이고 우후공의 2子로 諱는 만근(萬根)이며 號는 불발(不拔)이다. 세조5年 1459年 기묘년(己卯年)에 출생하여 중종20年 을유 1525年 향년 67세에 卒하였다. 사온서주부(司醞署注簿) 사헌부감찰(司憲府監蔡) 목천현감(木川縣監) 함흥부판관(咸興府判官) 사도시첨정(司導寺僉正) 평양서윤(平壞庶尹) 의성현령(義城縣令)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 임천군수(林川郡守) 금산군수(錦山郡守) 등을 역임하였으며 가선대부 이조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의 증직을 받았다. 配位는 광주정씨(光州鄭氏)로 고려 문하찬성이던 신호의 후예이며 운봉현감 의충의 자손인 고성군수 절의 따님이다. 墓는 향선재 영역의 직장공(直長公)의 묘하 자좌합조로 모셔져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향사(享祀)를 받들고 있다.

子 비(毗), 해(畡), 준(畯)


7) 충정공계 7세조 병사공 휘 준(畯)
 병사공은 만근의 셋째 아들로 자는 주경(周卿)이며 연산 10년 갑자 1504년에 급제하여 문과장천으로 정2품 가선대부, 북도병마절도사겸 경성도호부 부사를 역임하고 옹주의 수령을 전수하였으며 청백근엄하여 당대에 널리 이름난 분이다. 첫째 아들 원수도 중종 29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를 지냈고 셋쨰 아들 정수와 넷째 아들 길수도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내었다.

그러나 촉망받던 공의 둘째 아들인 금호공 형수(亨秀)가 1547년 벽서지변으로 사사(賜死)되니 득병하여 그 이듬해 1548년 죽었다. 배위는 안동권씨로 현감 석의 따님이고 향선재 내에 모셔져 음력 10월 15일에 향사를 받들고 있다.

子 : 원수, 형수, 정수, 길수


8) 충정공계 8세조 금호공(錦湖公) 형수(亨秀)
병사공 휘 준의 둘째 아들로 호는 금호이고 휘는 형수이다. 신묘년 중사마, 을미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을 수년간 하다가 시강원강서(侍講院 說書)로 가셨다. 인조가 기해년에 병조좌랑과 이조좌랑의 벼슬을 내렸으며 홍문관 교리, 이조정랑, 사헌부장령, 사간원 사간을 역임하였으며 홍문관 응교에서 전한으로 단계가 높아졌다. 을사년 7월에 인조가 승하하자 문정황후가 조정에 임했고 간신들이 공의 명망을 시기하여 군기시정(軍器寺正)으로 직위를 변경한 다음 산릉도감 랑청(山陵都監郞廳)을 맡기다가 10월에 제주 목사로 내보냈다.

제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명망이 높아가자 그를 파직하여 나주로 보냈으며 그때 제주 백성들이 붙잡고 울었다고 한다. 제주에서 고향인 나주로 귀향해 있던 중 벽서지화의 우두머리로 참소되어 절도에 안치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사약이 내려졌다. 김오랑이 나주로 와서 사약을 내리니 나이 34세인 정미년 9월이었다. 공은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며 문장과 예를 갖추었으며 일에 대한 옳고 그름이 확실한 선비였다. 그 뛰어남으로 나라의 동량으로 천거되고 당대의 명승인 퇴계 선생이 애지중지한 사람으로 공이 돌아가시자 이를 슬퍼하셨다. 하서 김선생 역시 공이 떠남을 애석해하면서 공을 동량의 재목으로 비유하는 곡을 남기셨다. 융경 정묘년에 선조가 즉위하여 공론을 거쳐 최종적으로 신원설치의 은전을 입게 되었다. 금호공의 묘소는 나주시 향선재 선영에 있으며 위패는 등림사에 모셔져 있고 금호유고가 남아 있다. 배위는 하동 정씨이고 1남 2녀를 두었다.

子 구


9) 충정공계 8대조 송호공 휘 박(撲)
충정공 8대손이며 호는 송호공이고 휘는 박(撲)이다. 송호공은 을사사화에 자신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룬 금호의 재종질이고, 이괄의 난에 광주목사로서 목숨을 바쳐 의義를 행한 관해의 삼종형이다.

선조때 천거를 받아 사옹서 봉사(司饔署奉事)에 임명되고 선교랑의 위계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병사 이복남과 더불어 남원에 입성하여 왜병과 분투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자 북향 사배하고 정유년 1597년 순절하였다 조정에서는 예를 갖추어 어사를 파견하여 아들 경발에게 전답 50결을 내리고 잡역을 면제하는 구휼을 받았다. 영조 임술년 1,742년 정려를 내리고 1,748년에 사헌부 집의 종3품의 증직을 받았다.

정려는 송월동에 있었는데 도시개발로 인해 향선재 관내로 옮겨 설치하였다. 정려 안에 목판으로 교지/증통훈대부사헌부집의 행선교랑 사옹원봉사 임박지려/ 숭정기원 후 임술 사월 일 (敎旨/贈通訓大夫司憲府執義 行宣敎郎 司饔院奉事 林樸之閭/ 崇禎紀元 後 壬戌(1743년) 四月 日)을 새겨 보존하고 있다. 배위는 양성이씨(陽城李氏)이며 묘는 송월동 선영에 있다. 위패는 2015년 국가사적으로 승격한 만인의총 충렬사에 모셔져 있고 만인의사 순의 제향은 매년 9월 26일이다.

子 경발


10) 충정공계 8세조 청양공 휘 정수(貞秀)
병사공의 3남으로 字는 사성(士成)이다. 명종(明宗) 1年(154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여 진사에 발탁되고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이어 청양현감(靑陽縣監)을 역임하였다. 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參贊官)을 증직(贈職) 받았으며 청양(靑陽)에 선정비(善政碑)가 남아있다. 配位는 숙부인(淑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이며 1582年(선조 15年)에 卒하였다.

子 식(植), 집(楫), 회(檜)  


11) 충정공계 9세조 관해공 휘 회(檜)
관해공은 금호공의 조카로 휘는 회(檜)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재주가 비범하여 어릴 적부터 말과 문자를 할 줄 알았고 임오년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계미년에 부인상을 당하고 얼마 되지 않아 승지공과 좌랑공이 타계하여 7년 상을 모시다가 상복을 벗고 송강 정상국 집안과 혼인 약조 8년 만에 혼인하여 약조를 지켰다. 나이 오십이 되어 신해년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전적을 받았으나 이이첨 등에게 모함을 당하여 공은 양산으로 유배하고 아들 득붕은 곤양으로 귀양 보냈다. 귀양간지 10년 만에 반정으로 임금이 바뀌어 사면을 받아 군기시 첨병을 제수받았다. 남한산성을 수리할 사람으로 추천되어 광주목사가 되었다.그러나 곧 이괄의 난이 일어나 임금이 남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뒤쫒아 나섰으나 이미 지나간 뒤였다. 귀로에 경안역에서 이괄 반란군과 만나 싸웠으나 오합지졸인 그의 군대는 패하여 공은 적에게 잡히었다. 그렇지만 항복하지 않고 이괄을 나무라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명을 내려 작위와 공을 치하하는 정려를 내렸다. 묘소는 나주 향선재 묘역 내에 있으며 정려각은 송월동에 있다가 도시개발로 향선재 선영 내로 이설하였다. 배위는 貞夫人 연일정씨(延日鄭氏)이다.

子 득열(得悅), 득붕(得朋), 득이(得怡), 득재(得才), 득무(得懋)


12) 충정공계 9世祖  송파공(松城公) 諱 식(植)
송파공(松坡公)은 충정공(忠貞公)의 9세손이며 청양공(靑陽公)의 1子로 諱가 植이다. 字는 숙무(叔茂)이며 號는 송파(松坡)로 父는 청양공(靑陽公) 諱 정수(貞秀)이다. 좌승지를 추증받은 형조좌랑이었다. 중종 34年 기해 1539年에 나주 송현에서 출생하고 향년 51세 선조 22年 기축 1589年에 졸(卒)하였다. 명종 19年 1564年 갑자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율곡 선생 이름이 붙은 방의 2등이었다.

선조 임신년 1572年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심충겸이 장원한 방에서 4등을 하였다. 첫째 부인은 해주최씨(海州崔氏) 도수 제운의 따님인 문헌공 충의 후손을 맞이하였고 아들 둘을 두었으며 장남은 득인(得仁)으로 주부,차남은 득의(得義)로 절도사를 지냈고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토벌하여 청난공신(淸難功臣)에 기록되어서 公은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둘째 부인은 창원유씨(昌原兪氏) 참판 필의 따님으로 보문각 제학경의 후예를 맞이하여 4남 3녀를 낳았고 첫째는 득례(得禮),둘째는 득지(得智), 셋째는 득신(得信)으로 진사, 넷째는 득제(得悌)였으며 장녀는 관찰사 임서,차녀는 진사 임집, 셋째는 김탕에게 시집을 보냈다.
셋째 부인인 전의이씨 사이에 득량(得良),득검(得儉)을 두었다.
公은 삼백년 벼슬하는 가문에서 태어나 약관 때부터 재주가 남의 우측(남보다 못한)에 자리하는 법이 없었으며 관복을 18년간 입었고 벼슬이  3품으로 끝나셨다. 공의 둘째 아들 득의가 청남공신이 되어 公의 여덟 아들과 아홉 명의 손자가 모두 공신명록에 실렸습니다.
墓는 충남 청양군 화성면 수정리(忠南 靑陽郡 化城面 水汀里)에 모시고 매년 음력 10월 초정일(初丁日)에 향사(享祀)를 묘제로 받들어 오다 2017년부터 같은 날 산천재(山泉齋) 재실에서 향사(享祀)를 봉행(奉行)하고 있다.

子 득인(得仁), 득의(得義), 득례(得禮), 득지(得智), 득신(得信), 득제(得悌),득양(得良), 득검(得儉)


13) 충정공계 10世祖 평성군(平城君) 휘 득의(得義)
평택임씨 1세조인 충정공 휘 언수(彦脩)공의 10세손으로 송파공 휘 식(植)의 둘째 아들이며 휘는 득의(得義 1558-1612)이다.
선조 18년에 장천(將薦)으로 무과에 등제하여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이 되셨으며 선조 29년(1596년)에 이몽학이 홍산에서 난을 일으켜 홍주로 몰려오자 가솔과 의병 8백여 명을 거느리고 홍주성에 들어가 홍가신과 함께 난을 진압하니 왕이 충청도수군우후(忠淸道水軍虞候)에 제수하였다. 1604년 청난공신(淸難功臣) 3등급에 평성군(平城君)으로 책봉되었으며 양주 축석령(祝石嶺)에 20여 정보의 사패지(賜牌地)를 내렸고 광해 1년(1609년)에 절충장군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를 역임했으며 1612년 향년 54세로 타계하셨다. 타계 후 양주군 시둔면 자일리 축석령 사패지에 예장(禮葬)으로 모셨다가 1647년 (인조 25년)에 충남 홍성군 서부면 판교리의 현재의 위치로 면례(緬禮)하여 불천지위(不遷之位) 부조묘(不祧廟)인 정충사(靖忠祠)에 배향하고 있다.

조부이신 휘 정수께서 청양현감을 역임하시고 아버지인 송파공께서 낙향하여 홍성군 결성면 부해정에 머무르셨고 셋째 아들 휘 전께서 홍주목사를 역임하시고 1646년 8월 20일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 1등에 책봉되시면서 그 공으로 아버지인 평성군에게 1947년 5월 15일 분충출기 청난공신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훈련원사평성군(奮忠出氣 淸難功臣 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五衛都總府都總管 訓鍊院事 平城君)에 추증과 함께 사패지의 은전을 받게 된 것이 묘소를 홍성으로 옮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평성군의 묘역은 현재 충남 문화재 제340호로, 정충사 목조건물은 충남 문화재 제401호로 영정은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203호로 지정되어 군수가 제를 모시고 있다. 배위(配位)는 여흥민씨로 찰방 서남(恕男)의 따님이요 부원군 효증(孝曾)의 현손녀이시다.

子. 찬(巑) 집 ,전, 우(嵎)


14) 충정공계 11世祖 송화공(松禾公) 諱 집
송화공은 충정공의 11세손, 평성군의 둘째 아들로 字는 치원(致遠)이고 휘는 집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송화현감(松禾縣監)과 해주진관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역임하시고 청난공신(淸難功臣)의 봉작을 받았다. 配位는 淑人 무주김씨이며 1657년 출생하여 1691년 타계하셨다.
묘는 축석령 선영에 합장하여 모셨다가 1988년 포천군 소홀면 이동교리에 세운 평택임씨가묘인 천보사(天寶祠)에서 향사를 지내고 있다.

子 : 진교(震喬), 중교(重喬), 유교(有喬), 지교(之喬), 정교(挺喬), 시교(時喬)


15) 충정공계 12世祖 진사공(進士公) 휘 유교(有喬)
공의 휘는 유교(有喬)이고 자는 치대(致大)이며 송화공의 셋째 아들로 통덕랑이며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냈다. 여섯 형제가 있었는데 첫째 형인 진교(震喬)는 승정원 좌승지로 종가(宗家)로 출계(出系)하였고 둘째 중교(重喬) 넷째 지교(之喬)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냈으며 다섯째 정교(挺喬)는 성균진사이다.

配位는 恭人 광주김씨이고 제(濟) 방(滂), 순(淳)의 세 아들을 두었다. 첫째 아들 제(濟)는 숙종 9년에 증광시에 급제하여 성균진사를 지내고 둘째 아들 방(滂)도 성균 진사이고 3남 순(淳)도 통덕랑이다. 묘소는 홍성군 서부면 판교리 선영에 모셨으며 천보사에서 시향을 봉행하고 있다.

자​ 제(濟), 방(滂), 순(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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