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고찰

상계 조상편(上系編)

상계 조상편(上系編)

본문

1) 태시조(太始祖) : 은태사 비간(比干)공과 사적

전 세계 임씨의 태시조는 지금으로부터 3천 1백여 년 전 중국 헌원황제(軒轅皇帝) 의 33대손이자 황하 유역의 은나라 29대 태정제(太丁帝)의 둘째 아들인 비간공(BC 1092- BC1029 )이다. 비간공은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의 숙부로 주왕의 폭정을 충간하다가 죽임을 당한 대표적 충신의 표상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주왕은 하(夏)나라 걸왕(桀王)과 함께 고대사의 대표적 폭군으로 달기라는 미희에 빠져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이루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나날을 보내고 간언을 하는 사람을 숯불에 태워 죽이는 형벌(炮烙之刑 : 포락지형)까지 제정하는 등 잔악무도(殘惡無道)했다고 한다. 이런 주왕에게 입바른 소리를 한 충신에는 미자(微子)와 기자(箕子), 비간(比干)의 '은삼현(三賢)'이 있었는데 미자는 간언이 소용이 없자 이웃 나라로 떠났고 기자는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천민들 속으로 숨었다. 그러나 비간은 “제왕(帝王)이 허물이 있는데도 간하지 않으면 충성(忠誠)이 아니며, 죽음이 두려워 말하지 않는다면 용기(勇氣)가 아니다”라며 간언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주왕은 "네가 성인인 체하는데, 성인은 예부터 심장에 구멍이 7개라는데 어디 확인해보자"라며 비간의 가슴을 베어 죽이고 말았다.

□ 태시조 비간공의 사적

사마천은 사기(史記)에 비간공(BC1092-BC1029)을 미자(微子), 기자(箕子)와 함께 은나라 말기의 세 명의 어진 사람을 가리키는 ‘은삼인(殷三仁)’으로 칭하고 특히 비간의 죽음을 기려 충의의 표상으로 기록했다. 은나라 패망 후 5백여 년 뒤에 활동한 공자(孔子)도 논어에서 비간공을 유명한 백이·숙제와 더불어 뜻을 굽히지 않은 의로운 인물로 높이 평가하였고 비간의 무덤을 찾아 친필 비문을 남겼는데 이것이 공자의 유일한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민간(民間)에서도 비간공은 충신(忠臣)의 전형(典型)으로 존경을 받으며 글과 재물[文財]을 관장하는 문곡성(文曲星, 九星 가운데 네 번째 별)의 화신(化身)으로 숭앙(崇仰)하고 있다. 

비간(比干)의 묘역은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하남성) 신샹(新乡)시 웨이후이(衛輝)에 있는데 은나라 후기에 만들어졌고, 주나라 무왕이 봉묘하고 중건하였다. 비간의 묘와 사당이 한곳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당 부지면적은 약 86,600㎡이고 묘소는 높이 20m, 지름 50m, 면적 13,000㎡이다. 비간 묘역에는 중국의 역대왕조들과 문인들이 비간을 기리는 글을 담은 석비(石碑)가 늘어서 있어 중국 고대 서예의 보고(寶庫)라고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시비(詩碑), 원나라 때의 연우비(延祐碑), 당나라 때의 정관비(貞觀碑), 북위 때의 태화비(太和碑) 등이 있다. 비간공 서거 500여 년 지난 후 충신 비간(比干)을 추모하기 위하여 공자가 쓴 친필 휘호 “殷比干莫”라고 쓴 비(공자가 비간 묘 앞의 땅에 칼로 “殷比干莫”라고 쓴 것을 비석으로 만듬)가 있다.

비간 묘역은 중국의 “전국 중점문물보호지”로 지정되고 중국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25일에 “비간공순국제향전(比干公殉國祭享展)”을 개최하고 있다. 비간공이 순국하신 3,065주년인 2023년에도 중국 정부 요인과 세계의 임씨 후손 그리고 시민들이 모여 성대히 거행한다.



2) 득성시조(得姓始祖) : 임견(林堅)공과 사적

비간공(比干公)이 조카인 주(紂) 왕의 폭정을 충간하다 죽임을 당했다. 비간공(比干公)의 부인 진씨(陳氏)는 당시 임신한 몸으로 후손을 잇기 위해 하남성 위휘시(河南省 衛輝市)로 피신하였다. 목야(牧野)의 장림산(長林山)의 석실(石室)에서 아들을 낳아 이름을 천(泉)으로 지었다. 천(泉)이 3살이 되었을 때 은(殷)나라가 망하고 BC 1,046년 주(周)나라가 들어서자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충신 비간의 묘를 찾아 표(表)를 세웠다. 또한 비간공(比干公)의 부인 진(陳)씨와 아들 천을 궁(宮)으로 불러, 아들 천(泉)에게 장림산(長林山)의 석실(石室)에서 태어났으므로 장림산(長林山)중 임(林)자를 택해 “임씨(林氏)”라 사성(賜姓)하고 굳세게 자라라는 의미로 이름을“견(堅)”으로 바꿔주면서 박릉(博陵, 넓은 언덕 땅)을 식읍(食邑, 국가에서 공신에게 땅을 주고 조세를 개인이 받아 쓰게 하는 제도)으로 주었다. 이에 임씨선조보감(林氏先祖寶鑑)에는 임견(林堅)公을 전 세계 수풀림씨의 득성시조(得姓始祖)로 모시고 은태사(殷太師) 비간공(比干公)을 태시조(太始祖)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임씨는 득성전(得姓前)의 성씨를 보면 황제헌원에는 공손(公孫)씨다. 황제헌원의 정비(正妃)인 누조(嫘祖)의 장남 현효(2대손. 玄嚣)가 희(姬)씨라는 성이었고, 순임금에게서 상나라에 봉해진 헌원 5대조 계(契)의 할아버지는 자(子)씨라는 성이었으므로 성씨가 공손(公孫) 희(姬), 자(子) 씨인 이들도 우리 임씨의 원조(遠祖)라고 할 수 있다.  

□ 득성시조(得成始祖) 임견(林堅)공의 사적 득성시조 임견의 사적(史蹟)으로는 득성시조가 태어난 하남성 위휘시 와룡촌(河南省 衛輝市) 장림산에 있는 장림석굴과 임견공의 초상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사당은 태시조와 함께 하남성의 비간 묘역에 있다.

3) 중국의 임씨世系와 직계 중국조상의 사적

득성시조(得姓始祖) 임견(林堅)公에서 시작된 임(林)씨는 세계적으로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대략 7천만 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중국 본토에 5천만 명(중국 개성씨 중 15위) 나머지 2천만 명은 대만 2백만명(제2위 성) 한국 80만 명(10위) 일본 50만 명(18위) 등 동남아 각국에 널리 분포되어 사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의 수풀 임씨는 당나라 말기에 신라로 동도(東渡)한 임팔급(林八及)公을 도시조(都始祖)로 헌헌황제로 부터는 117대, 그리고 태시조 비간(比干)공부터 도시조 팔급까지는 84세에 이르는데 그 세계(世系)를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득성 이후 3천여 년간 임씨는 중국 역사에서 많은 공적을 남겼는데 우리 직계 중 중요한 몇 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득성시조 43세 술공(述公)

술공(述公)은 헌원황제 76대 득성시조 43세로 한경제(漢景帝)시대의 소부(小府)로 임명되시고 양(良)을 낳았다. 한경제(漢景帝)시대에 제군(濟郡)을 나누어 제남군(濟南郡)을 두었으니 거기서 살던 임씨는 제남 사람이 되어 술공은 제남당(濟南堂) 임씨의 시조가 된다.

□ 득성시조 64세 녹공(祿公)

록공(祿)은 득성시조의 64세로 서진(西晉)에서 태어나 부친과 낭야왕 사마예(司馬睿)와 함께 남도(南渡)하셨고 낭야왕이 칭제(稱帝)하면서 황문시랑, 초원장군, 합포태수를 역임하고 동진명제(東晉明帝) 태녕 3년에 진안군 태수에 임명되고 그때부터 진안에 살면서 가문을 이루었고 동진목제(東晉穆帝)때 진안군왕으로 추봉되었다. 녹공은 민림(閩林)의 시조가 되며 그의 후예들은 대만을 비롯하여 복건성, 광동성, 강서성 등과 해외 각지로 많이 나가 화교로 살고 있다. .

□ 득성시조 80세 온공(蘊公)

임온공은 득성시조 80세로 도시조 팔급공의 고조부이시다. 임온공은 임피공의 여섯째 아들이다. 임피공은 슬하에 9형제를 두어 아홉 분 모두가 자사(刺史, 州를 관장하는 지방행정 장관)를 지내셔 보전9목사(莆田九牧詞)라 칭하였고 이들이 임씨의 구목연파(九牧衍派)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손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태국, 대만, 미얀마, 라오스, 인도네시아 등으로 나갔다.
이들 9목사의 묘소는 현재 중국의 문물사적(文物史蹟)으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보호되고 있다.

우리나라 임씨의 원류가 되는 임온(林蘊) 공(서기 767-826)은 강주자사 임피(林披)의 아홉 아들 중 6남이다. 경사(經史)에 통달하셨던 분으로 진사, 어사를 역임하였다. 서천(西天)절도사 봉직시 유벽(劉辟)이 반란을 일으키자 여러 번 서신을 보내 만류하였더니 유벽은 오히려 군사를 시켜 옥에 가두고 형을 집행하려 했으나 임온 할아버지가 크게 꾸짖으면서 “험한 나라엔 들어가질 말고, 어지러운 나라엔 살지 말라 했거늘(危邦不入 亂邦不居), 내 지금 반란을 일으킨 곳에 있으니 살지 않는 게 오히려 낫겠다”라고 했다. 유벽은 그 기백을 높이 사 회유하려고 행형자(行刑者)을 시켜 목에 칼을 오가며 위협하자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만 내 목을 칼 가는 돌로 취급할 터이냐?” 라고 일갈했다. 이에 유벽이 감탄하여 “참으로 충신이로다”라고 하며 석방하였다. 그 뒤 유벽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조정에서 불러 중임하려 했으나 고사하시어 조정회의 결과 임온은 술을 좋아하니 중앙보단 경치 좋은 곳에 살도록 조정의 재상으로 두되 현직은 지방장관으로 하자 하여 소주자사로 부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임온(林蘊, 黃帝 113세손, 比干 80세손)은 임원(林愿)을 낳고, 임원(林愿)은 임옹(林邕)/임동(林同)을 낳았으며, 임옹(林邕)은 다시 임문범(林文范)/임문회(林文回)를 낳고, 임문범(林文范)이 도시조 임팔급(林八及)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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