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고찰

상계 조상편(上系編)

상계 조상편(上系編)

본문

1) 평택임씨의 정착과 호족(豪族)으로의 성장(成長)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公과 7학사(七學士)가 지금의 평택시(平澤市) 팽성(彭城)에 동도(東渡)하여 정착(定着)하던 시기의 신라(新羅)말은 우리나라 역사상(歷史上)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混亂)스러운 상황이었다. 통일 신라의 중앙(中央)정부가 지방에 대한 통제력(統制方)을 상실해 감에 따라 지방세력(地方勢力)인 호족(豪族)이 등장하고 이들 호족(豪族)은 후삼국(後三國) 시대를 지나 고려(高麗)가 건국(建國)되는데 핵심(核心) 세력으로 성장한다.

호족(豪族)의 존재(存在)는 한국(韓國) 중세사(中世史)와 임씨 가문의 국내 정착과 성장 과정을 살펴보는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存在)들이다. 해상왕이라 부르던 장보고(張保皐)가 암살(暗殺)된 후 신라(新羅)와 당(唐)나라와의 교역(交易)이 10여 년 중단되다가 서·남해(西南海)를 중심으로 새로운 해상(海商)세력들이 출현(出現)하기 시작한다. 이들 해상(海商)세력 가운데 대표적인 존재(存在)는 송악(松嶽 지금의 개성)의 고려(高麗)를 개국(開國)한 왕건(王建)의 왕씨(王氏) 가문이고 다음으로는 나주(羅州)의 해상호족(海上豪族) 다련군(多憐君) 나주(羅州) 오씨(吳氏)와 아산만(牙山灣) 연안(沿岸)의 박술희(朴述熙) 가문(家門)와 복지겸(卜智謙)가문(家門)의 세력(勢力)들이 있었으며 남해안(南海岸)의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에는 왕봉규(王逢規)가 해상호족(海上豪族)으로 강주(康州)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위의 해상호족(海上豪族) 세력들은 후삼국(後三國) 시대와 고려건국(高麗建國)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인물(人物)들인데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公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인물(人物)들이다. 장보고(〜846年)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당(唐)나라와의 해상교역(海上交易)이 중단되어 있었는데 이때 이들이 해상무역(海上貿易)이 재개(再開)되는데 그 중심(中心)역할을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公이 하였다. 도시조 팔급공은 당(唐)나라에서 병부상서(兵部尙書)라는 고위직과 장보고 신라방(新羅坊)인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의 견당대사(遺唐大使)의 경험을 토대로 당(唐)나라 인맥(人脈) 및 장보고 선단의 사람들과 서남해(西南海)의 해상세력(海上勢力)을 연결하는 중개무역(仲介貿易)으로 재력을 쌓았고 그 재력을 바탕으로 호족세력(豪族勢力)으로서의 기반(基盤)을 다졌다.

당시 장보고(張保皐) 사후(死後)의 서남해상(西南海上)에는 신라조정(新羅朝廷)의 통제(統制)가 불가능한 틈을 타 해적(海賊)들이 창궐(猖獗)하여 아산만(牙山灣) 일대 당성진(唐城鎭) 주변의 해상(海上)과 그 일대 주민들의 피해가 컸는데 이때 그 지역 호족세력(豪族勢力)인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公과 면천복씨(沔川卜氏) 호족세력(豪族勢力) 그리고 면천박씨(沔川朴氏) 호족세력(豪族勢力)들이 연합(聯合)하여 서해안의 해적(海賊)들을 소탕했던 걸로 보인다. 평택임씨(平澤林氏) 족보(族譜)에 적병이 변방(邊方)을 침공함에 公께서 그 지역 사람들을 모아 적병을 분연히 토벌(討伐)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동시대(同時代) 같은 지역(地域)인 당성진(當城鎭)의 면천복씨(沔川卜氏) 족보에 시조(始祖)인 복지겸(卜智謙 생졸년 미상)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의 부(父)인 복학사(卜學士)가 그 일대 사람들과 힘을 합쳐 서해안(西海岸)의 해적(海賊)들을 토벌(討伐)하였다는 면 기록이 있고 면천 박씨(沔川朴氏) 족보(族譜)에도 같은 시기에 면천박씨(沔川朴氏) 시조(始祖)인 박술희(朴述熙 ~945年)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의 부(父)인 박득의(朴得意)가 아산만(牙山灣)의 해적(海賊)들을 일대 사람들과 힘을 모아 해적(海賊)들을 소탕(掃蕩)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평택임씨의 기록과 일치(一致)하며 우리 가문과 이들 가문이 유대가 돈독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해적은 그 당시 국가의 골칫거리로 주민의 피해가 컸는데 이를 물리칠 힘을 가지고 있어 임씨 호족도 이젠 상당히 강력한 세력으로 정착,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2) 후삼국(後三國)시대의 평택임씨(平澤林氏) 가문(家門) 

평택임씨 가문은 남해안(南海岸)의 나주(羅州) 세력과 서해안(西海岸)의 해상세력(海上勢力) 그리고 개성(開城)과 패강진(浿江鎭) 지금의 大同江)의 해상세력(海上勢力)들과 연계(連繫)한 중개무역(仲介貿易)으로 막대한 재력(財力)을 쌓았다. 그리고 평택농성(平澤農城)을 기반으로 천안지방(天安地方)과 청주(淸州) 그리고 진천지방(鎭川地方)으로 세력(勢力)을 확장하여 지금의 경기도(京畿道) 남부(南部)와 충청도(忠淸道)를 아우르는 군진(軍陣)을 갖춘 중부지방(中部地方)의 호족세력(豪族勢力)으로 성장하여 후삼국(後三國) 시대의 궁예(弓裔 연호 태봉 재위 901~918년) 정권과 왕건(王建847~918年 재위918~943年)의 고려개국(高麗開國) 그리고 고려초기(高麗初期)에 지대한 역할(役割)을 하게 된다. 

고려개국 이전에는 기록(記錄)을 보면 신라조정(新羅朝延)에서 팔급공께서 이부상서(吏部尙書)의 벼슬을 제수(除授) 받았으며 후삼국(後三國) 시대 궁예(弓裔)가 강성하자 궁예(弓裔)에 귀부(歸附)하였다는 기록(記錄)이 전해진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記錄)을 보면 895年(眞聖女王 7年) 궁예(弓裔)는 우리 임문의 임명필(林明弼)을 비롯 장귀평(張貴平) 이흔암(伊昕巖 ~918年) 종간(宗侃 〜918年) 환선길(桓宣吉〜918年) 등 휘하(麾下) 장수들을 중심으로 관직(官職)을 설치하고 후고구려를 창업(創業)하여 기틀을 다졌다. 기록(記錄)으로 보면 1世代인 도시조(都始祖) 諱 팔급(八及)公의 뒤를 이어서 2世代인 태사공(太師公) 諱 양저(良貯)와 3세대(世代) 충렬공(忠烈公) 諱 무(碔) 시랑공(待郞公) 諱 적여(積璵) 도항공(都航公) 諱 상난(湘煖)公이 후삼국(後三國) 시대의 임문(林門)을 성장(成長)시켰다.  

3) 고려건국(高麗建國)과 평택임씨(平澤林氏) 가문(家門)

우리 임문(林門)은 신라(新羅)말기(846〜918年)에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公 이 건립한 경기도 평택농성을 기반으로 지금의 충청도 천안(天安)과 청주(淸州) 그리고 진천(鎭川)을 포함한 중부지역의 강력한 호족세력으로 고려건국(高麗建國 918〜1382年)에 커다란 공(功)을 세웠다. 그 결과 고려개국(高麗開國 918年)에 건국공신(建國功臣)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왕실(高麗王室)의 외척세력(外威勢力)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기록을 보면 諱 무(碔)公을 순군부령(徇軍部令 918年 지금의 국방부장관)으로 삼고 파진찬(波珍湌) 임희(林禧)를 병부령(兵部令 918年 지금의 총참모총장)으로, 임상난(林湘煖)을 도항사향(都航司鄕, 현재의 해군 대장)으로 군권을 장악(掌握)했다. 임적여(林積璵)를 광평성(廣評省)의 광평시랑(廣評侍郞)에 임명(任命)하고 임식(林寔)을 광평랑중(廣評郞中)에 임명(任命)하였다. 광평성(廣評省)은 국사를 관장하는 가장 중요한 관부(官府)로 장관(長官)인 시중(侍中)은 총리(總理)에 해당하며 호족연합(豪族聯合) 정권인 고려초기(高麗初期)의 호족세력(豪族勢力)을 대변하는 기구였다. 이러한 관부(官府)의 차관(次官)인 시중(侍中)과 그 다음 직책인 랑중(郞中)에 임명(任命)될 수 있는 인물이라면 유력한 호족(豪族)이라야 가능했으며 고려건국(高麗建國)에 우리 임문(林門)이 왕건(王建)의 고려건국(高麗建國)에 군사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고려(高麗)를 건국(建國)한 왕건(王建)은 병권(兵權)과 국사(國事)를 관장하는 핵심인 순군부(巡軍府)와 광평성(廣評省)을 왜 임문(林門)에게 맡겼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시조(都始祖)인 팔급(八及)公과 왕건가문(王建家門) 왕융(王胤)과의 인연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시조(都始祖)께서 당나라로부터 서기 846年에 신라(新羅)로 망명하여 서해안의 해상세력과 연계하여 장보고(張保皐) 사후의 해상무역을 시작할 때 송악(松嶽)의 왕씨 가문(王氏 家門)을 비롯한 나주(羅州)의 오씨가문(吳氏 家門), 당성진(當城鎭)의 면천박씨가문(家門), 복지겸가문(卜智謙 家門)과 당(唐)나라와 연계(連繫)하여 중개무역(仲介貿易)을 통한 밀접한 신뢰와 이해관계(利害關係)를 맺었으며 초기 태봉국(泰封國)의 궁예(弓裔)가 강성할 때 서해안(西海岸) 호족(豪族) 모두가 궁예(弓裔) 휘하에 귀부하여 궁예(弓裔) 정권 하에서 핵심적인 일을 하였다. 그때 궁예(弓裔) 정권에서 왕건(王建)과 대광(大匡) 임명필(林明弼)公의 따님인 신명왕후(神明王后) 林氏가 혼인(婚姻)하였으며 왕건(王建)이 궁예(弓裔)를 제거하고 고려(高麗)를 건국(918年)했을 때 장인(丈人)되시는 충열공(忠烈公) 임명필(林明弼)公께서 평택농성(平澤籠城)과 천안(天安) 그리고 진주(鎭州)의 임문(林門)들을 동원(動員)하여 전폭적으로 왕건을 후원하였다.

임문(林門)들이 장악한 경기도 평택(平澤)과 청주(淸州). 천안(天安) 그리고 진주(鎭州 지금의 진천)는 삼국의 중앙인 중부지방(中部地方)으로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의 통일전쟁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은 궁예(弓裔)의 초기 세력 기반 지역이었으며 왕건이 궁예를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제거하고 고려를 건국 이후에는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과 왕건의 치열한 전쟁터였으며 양쪽의 전초기지(前初基地)이자 완충지역이었다. 위와 같은 요충지 중부지역(中部地域)을 장악하고 있던 우리 임문(林門)의 세력들이 왕건(王建)에게 귀의(歸依)하자 관망하고 있던 또 다른 중부지역의 호족세력들이 왕건(王建)에게 귀의하였다.

경기도와 충청도 중부지역의 호족세력들이 왕건(王建)에게 귀의하자 전선(戰線)은 급격히 왕건(王建)에게 기울고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은 세가 급격히 줄어 왕건에게 유리해지고 신라의 경순왕(敬順王 ~978年)이 935年에 스스로 투항하여 신라(新羅 기원전 77年~935年)가 멸망하였다. 후백제(後百濟 892~936年)의 견훤(甄萱)이 935年 아들인 신검(神劍)의 반란으로 왕건에게 투항하고 936年 고려 왕건(王建)과 후백제(後百濟 892年~936年)의 신검(神劍)이 김천(金泉)지역인 일리천(一利川) 전투(戰鬪)에서 고려(高麗)의 태조 왕건(太祖王建 877年~943年)에게 크게 패하여 결국 서기 936年에 후백제(後百濟)가 멸망하고 태조왕건(太祖王建)이 서기 937年에 삼국(三國)을 통일하였다.

위와 같이 우리 임문(林門)은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건국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워 고려건국(高麗建國) 후 2代 王을 거쳐 세분의 왕비(王妃)를 배출하였으며 왕실(王室)의 외척세력(外戚勢力)이자 고려(高麗)의 핵심 세력으로 왕실(王室)의 심장부에서 활동하였다.

4) 고려시대의 평택임씨 선조와 사적

고려 건국 시대의 선조에는 4세손 임희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쟁쟁한 선조들이 계시며 임문과 관련된 사적으로는 진천 농다리와 진천 대모산성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1) 진천농다리

진천 농다리(鎭川 籠橋)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산동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여 있는 다리이다.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8호 진천농교(鎭川籠橋)로 지정되었으나, 2013년 1월 18일 현재의 문화재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후삼국시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진천의 강력한 호족세력이던 팔급공의 증손자이고 고려태조 왕건의 아들인 고려 2代 왕인 혜종의 장인이자 의화왕후 임씨의 아버지인  충숙공 임희공이 왕건과 견훤의 세력다툼이 한창이던 시기 지금의 대구 팔공산에서 전투를 위해 진군하던 왕건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이 다리를 진천에 축조하였다고 전해온다.

사력 암질의 붉은 돌을 쌓아서 만들어진 다리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돌다리이다. 다리는 28칸의 교각이다. 지방유형문화재로서 길이는 93.6m, 폭 3.6m, 교각 1.2m 정도이며, 교각 사이의 내폭은 80cm 내외이다. 석회를 바르지 않고 그대로 쌓았는데도 견고하여 장마가 져도 유실됨이 없이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정자, 산책로, 초평저수지까지 연결된 수변 데크 등이 조성되어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으며, 신비로운 다리 모양과 주변 풍경이 잘 어우러져 드라마 촬영지로도 등장한다.

(2) 진천 대모산성

진천 대모산성(鎭川 大母山城)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에 있는 산성이다. 1,990년 12월 14일 대한민국의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당시 지정 및 보호구역이 일부만 지정됨에 따라 당해 문화재 보호 관리상 문제가 있어 2,005년 5월 27일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였다. 이 성은 고려시대 초기에 팔급공의 증손자이신 충숙공 임희(林曦)공이 백제의 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고대사회의 행정구역과 산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할미성이라고도 불리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의 대모산성은 『삼국사기』 전투 기사에 보이는 모산성(母山城)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의 총길이는 1,260m에 이르고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 문터로 짐작되는 자리가 있다. 내성의 벽은 자연 지형을 충분히 이용하여 흙을 층층이 다져서 쌓았고, 외성의 벽은 아래 기초 부분에 자갈돌을 넣고 점토가 많이 섞인 흙을 채웠다. 성의 외부는 경사가 급한 지형을 이루고 있으나 안쪽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다.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끼고 낮은 구릉지 위에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내·외성과 자성(子城)을 갖춘 특이한 형식이다.
5) 고려시대 평택임씨의 흥망성쇠

가) 전성기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건국(918年)하고 후삼국 시대(後三國時代)의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를 멸망시키고 후삼국(後三國)을 통일(統一 서기 936年)하여 고려(高麗) 초기 태조왕건(太祖 王建)에서 고려 4代 王인 광종(光宗)代까지 우리 임문(林門)의 중흥기(中興期)이자 전성기(全盛期)였다. 우리 임문은 이 시기에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 고려 초기의 정국(政局)을 주도(主導)하였다.

앞에서 전술하였듯 3세조 충열공(忠烈公) 諱 무(碔)公은 순군부령(徇軍部令국방부장관)을 역임(歷任)하고 팔급(八及)公의 증손자(曾孫子) 충열공(忠烈公) 諱 무(碔)公의 아들인 충숙공(충숙공) 諱 희(禧)公은 병부령(兵部令)을 역임(歷任)하고 諱 상난(湘煖)公은 도항사향(渡航司鄕)을 제수(除授) 받았다. 그리고 諱 적여(積與)公께서 광평시랑(廣評侍郞)에 오르고 諱 식(寔)公은 광평랑중(廣評郞中)에 임명(任命)되어 건국 초기(建國初期)에 병권(兵權)과 국사(國事)를 관장(管掌)하는 자리를 장악(掌握)하여 정국(政局)을 주도(主導)하였다. 그리고 우리 임문(林門)은 고려 초기 왕실(王室)의 외척세력으로 충열공(忠烈公) 諱 무(碔)公의 딸인 숙목부인(肅穆夫人) 임씨(林氏)와 천안태수(天安太守) 언(彦)公의 딸인 천안부원군부인(天安府院君夫人) 임씨(林氏)가 태조왕건(太祖王建)의 제4妃와 5妃에 책봉되었다.

또한 충숙공(忠肅公) 諱 희(禧)公의 딸인 의화왕후 임씨(義和王后 林氏)가 고려2代王인 혜종(惠宗)의 정비(正妃)로 책봉(册封)되어 2代에 걸쳐 세 명의 왕비(王妃)를 배출한 외척세력(外戚勢力)으로서 정치(政治)에 깊이 관여(關與)하여 막강한 영향력(影響力)을 행사(行事)하였다.


나) 쇠락기

고려(高麗) 元年에 왕건(王建)이 죽고 고려(高麗) 2代 王인 혜종(惠宗 재위 943〜945年)이 올랐으나 즉위 2年만에 왕요(高麗3代 王 定宗)와 왕소(高麗4代 王 光宗) 형제에게 피살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 2代 王 혜종(惠宗)의 외척세력인 임씨족단(林氏族單)세력(勢力)에게 불운(不運)이 닥치고 정종(定宗 재위 945~949年)을 거쳐 광종(光宗 재위 949~975年)시절에 왕권강화(王權强化)를 위해 호족말살(豪族抹殺)정책(政策)으로 혜종(惠宗)과 의화왕후 임씨(義和王后 林氏)의 아들인 흥화군(興化君 ~957年)이 피살(被殺)되고 외척세력(外戚勢力)이던 임씨 세력(林氏勢力)은 쇠락(衰落)하게 된다. 고려(高麗) 5代 王 경종(景宗 재위 975~981)시절에도 복수(復讐)법으로 천안부원부인 임씨(天安府院夫人 林氏)의 아들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 효성태자(孝誠太子 ?~976)가 피살(被殺)되고 숙목부인 임씨(肅穆夫人 林氏)의 아들인 원녕태자(元寧太子 ?~976)와 효녕태자(孝寧太子 ?~976)까지 피살(被殺)당하여 외가(外家)인 임씨세력(林氏勢力)은 정치의 핵심에서 멀어져 지방의 향리(鄕吏)로 전락하였다.


다) 중흥기

지방의 향리(鄕吏)로 전락한 임씨 가문은 서기 1,100년경 팔급(八及)公의 6代孫 몽주(夢周)公이 여덟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군(君)으로 봉해져 중흥기를 맞는다. 이들 8명의 아들 항렬은 아름다울 미(美)로 팔미손(八美孫)이라고 하며 여기에서 1차 분관이 이루어진다. 즉 팔미(八美)孫의 장남 견미(見美)는 평택군(平澤君)이며 차남 세미(世美)는 소양군(昭陽君),셋째 수미(秀美)는 진천군(鎭川君),넷째 의미(義美)는 선산군(善山君),다섯째 인미(仁美)는 나주군(羅州君),여섯째 성미(成美)는 상주군(尙州君),일곱째 자미(自美)는 부안군(扶安君),여덟째 계미(季美)는 성산군(星山君)으로 봉작되어 여기에서 분관(分貫)하였다.

그리고 고려중기(高麗中期)에는 최씨(崔氏) 무신정권(武臣政權)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崔竩 ?-1258)를 살해(殺奚)하고 집권(執權)한 김준(金俊)을 임씨가문의 임연(林衍 ?-1270) 장군이 제거하고 집권하였으나 그의 아들인 임유무(林惟茂 ?-1270)가 홍규(洪奎)와 송송례(宋松禮)에 살해됨으로써 임씨 무신정권(林氏 武臣政權)이 1,270년 종식되었다. 고려말 충정공 임언수의 둘째 아들 임견미가 1,361년(공민왕 10) 나주도도병마사(羅州道都兵馬使) 때 홍건적(紅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 일등 공신이 되었고 1,368년 명나라 군대가 원나라 연경(燕京)을 포위했다는 급보에 안주순무사(安州巡撫使)가 되었으며 1,370년 원나라 동녕부(東寧府) 토벌에 부원수(副元帥)로 참전했다. 1,374년 제주(濟州) 목호(牧胡)의 난이 일어나자 부원수로 토벌에 나섰다. 1,375년(우왕 1) 심양왕(瀋陽王) 터터부카[脫脫不花]의 모자가 왕위를 노리고 입국한다는 소식에 서경상원수(西京上元帥)로 출진, 이에 대비했다. 1,377년 왜구가 침입하자 동강부원수(東江副元帥), 서해도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출전했다. 1,380년 경복흥(慶復興)과 그 일당을 숙청하고 1,384년 문하시중이 되어 전권을 쥔 권세가가 되었다. 둘째 아들 임견미의 공적으로 중시조이신 임언수 할아버지가 충정공을 제수받았다.


라) 재시련기

고려(高麗) 말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왕 14年(禑王 32代 1388年)에 무진화변(戊辰禍變)에 세력(勢力)이 약한 최영(崔瑩)이 변방의 이성계(李成桂)와 손을 잡고 연합(聯合)하여 계파의 수장인 임견미(林堅味 ?~1388) 이인임(李仁任 〜1388) 염흥방( ~1388) 도길부( ~1388) 등이 모의하여 우왕(禑王 재위 1365〜1389)에 대한 모반(謨反)을 꾀했다는 죄목(罪目)으로 야밤에 기습(奇襲) 공격하여 이인임(李仁任) 일가를 제외한 가문(家門)들은 불과 10여 일만의 참화(慘禍)로 그 가족들이 천여 명이 도륙(屠戮)되고 학살되었다.

이때 임견미를 포함, 평택임씨(彭城林氏) 가문(家門) 5백여 명의 가솔(家率)들은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 등에게 살해(殺害)되었는데 이때 살아남은 일족들은 개성(開城)에서 지방으로 흩어져 나와 평택임씨(彭城林氏)가 갈라졌다. 이후 우리 평택임씨는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때 고려조에 충성하여 참여하지 않으면서 중앙 권부에서 멀어졌다.


6) 전국 임씨계보와 분관약사(分貫略史)

한국의 수풀림(林)씨는 당나라 때 동도한 임팔급이 시조로 모두 같은 조상이라고 할 수 있으나 도시조 팔급공에 대한 사실(史實)이 역사적으로 정립되지 못하여 지금은 일계 혈족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현재 수풀림씨는 팔급공을 도시조로 하는 평택임씨와 고려조 충렬왕 때 상장군을 지낸 임비(林庇)를 시조로 하는 나주임씨로 대별되고 있다. 그러나 나주임씨도 윗대를 규명하지 않고 원조(遠祖)로 하고 있는데 평택임씨 구보에는 몽주-자미-비로 계대되어 있어 평택임씨와 같은 혈족인 것으로 유추된다. 따라서 수풀림씨와 나주임씨와의 계보 또는 혈족인가에 대한 관계는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일 거다.

수풀임씨의 족보는 서기 870년경에는 모든 임씨가 팽성임씨 단본으로 있었고 1,000-1,100년까지 모든 임씨가 평택임씨로 사용되었다고 한다(임행진). 전국 임씨중앙회 족보분과위원회에서 편찬된 전국 임씨계보를 보면 그림과 같다.

전국임씨는 모두 비간공을 태시조로 하고 임견공을 득성 시조로하며 당나라 때 동도한 팔급공을 1세로 계대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평택관의 평택임씨이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분관되었다. 1차 분관은 1,130년경 팔급공의 7대손 몽주(夢周)공이 8남을 두어 이들을 9미손(8美孫)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나주임씨를 비롯해 이루어졌다. 실례를 들면 견미(見美)공에서 평택관, 자미(自美)공에서 나주관과 은진관, 기미(箕美)공에서 회성관, 계미(季美)공에서 울진,순창, 부안관으로 각각 분관되었다.

두번째 분관은 1,300년대 평택관의 15세조인 충정공 언수(彥脩)공이 네명의 아들을 두어 이를 4미손(4味孫)이라 하였는데 여기에서 분관이 이루어졌다. 즉 셋째 제미(薺味)에서 장흥관, 넷째 世味에서 조양관(兆陽貫)으로 분관되고 그 후 1,440년경에 여기에서 다시 林川, 전주, 보성, 안동, 臨河貫으로 분파되었다.

1,764年(영조40年)에 범임씨(凡林氏)중에서 평택임씨(平澤林氏) 충정공(忠貞公)系에서 평택임씨(平澤林氏) 족보(族譜) 갑신보(甲申譜)를 처음으로 발간하였다. 평택임씨 족보 발간 시 충정공(忠貞公)系에서는 전국의 임씨들을 통합하여 발간하려 했으나 여러 대(代) 동안 계대(繼代)가 불분명하고 문헌(文獻)이 부족하며 교통이 발달하지 못해 연락이 안 되고 자금(資金)까지 부족해 충정공계 장남 충간공(忠簡公)系 후손들을 위주로 평택임씨(平澤林氏)라 칭하고 족보(族譜)를 발간하였다.


그 이후로 족보(族譜)에 들어오지 못한 전국의 범 임씨(凡 林氏)들이 지역과 거주지 그리고 옛날 조상의 벼슬을 위주로 하여 관(貫)을 만들어 현재 24개의 관향(貫鄕)으로 갈라져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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