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고찰

상계 조상편(上系編)

상계 조상편(上系編)

본문

1)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공의 동도(東渡)

우리나라의 임(林)씨는 당나라 말기에 신라로 동도한 임팔급으로부터 대부분 연원(連原) 한다. 그러나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公이 동도(東渡)한 역사적 기록은 후삼국 시대와 고려(高麗)초의 역사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일본의 승려 엔닌(794〜864)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서기 854年에 당나라 체류 중에 장보고(張保皐),장영(張詠), 임대사(林大使),왕훈(王訓) 등의 인물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을 토대로 평택임씨(平澤林氏) 가문(家門)의 구전설화(口傳說話)와 평택임씨족보(族譜) 및 각 관의 족보(族譜),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역사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도시조(都始祖)는 당나라 문종(文宗 재위 824〜840年)시절 18세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출사(出仕)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歷任)했고 당나라 말 문종 때의 감로지변(835년)으로 도시조 팔급공도 간신배의 참소로 파직되어 장보고가 창건한 신라방(新羅坊)의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서 은거(隱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감로지변(甘露之變) 으로 많은 관리들이 멸족(滅族)의 화를 당했고 이로 인해 당(唐)나라 14代 문종(文宗 재위 826〜840年)은 곧 한(恨)을 품고 서기 840年에 죽고 15代 황제(皇帝) 무종(武宗 서기 840〜846年)이 즉위한다. 무종(武宗)은 도교를 믿어 불교(佛敎)를 배척(排斥), 회창(會昌) 5年(서기 845年)에 폐불(廢佛)을 단행하여 사찰46,000여 곳을 헐고 26만여 명의 승려와 여승(女僧)을 환속(還俗)시켰으며 환관(宦官)들은 실권(實權)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반대하던 옛 관료들을 제거하였는데 이때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 있던 팔급(八及)公도 폐불(廢佛) 반대파에 연루(連累)되어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이에 도시조(都始祖)는 뜻을 같이하는 동료 칠학사(七學士) 즉 유전(劉筌 강릉유씨 시조) 송규(宋奎 남양송씨 시조) 최호(崔冱), 공덕수(孔德狩 김포공씨 시조) 권지기(權之奇) 허동(許董),설인검(薛仁檢)과 중국(中國)의 팽성촌(지금의 복건성 泉州市 惠安县 彭城村)포구에서 장보고(張保皐) 선단의 배를 타고 신라(新羅)말 문성왕(文聖王 839〜857年) 846年경에 신라로 망명을 결행한다, (동도년도에 대해서는 870년 전후, 혹은 907년 전후 주장도 있음) (…林八及生逢唐末乱世,为了躲避“朱温篡唐”之祸,于唐哀帝天祐四年(公元907年)左右迁入新罗《中华民族姓氏渊源略考》,权威编辑室, 姓氏略考, 林姓, 迁徙分布(http://sinosurname.blog.sohu.com)).

산동반도(山東半島) 팽성을 출발하여 황해(黃海) 바다를 건너 신라(新羅)의 장보고 본진이 있는 청해진(淸海鎭) 완도(莞島)을 향하던 중 해상(海上)에서 7학사(七學士)가 탄 장보고선단(船團)에 장보고(張保皐 ~846年)가 신라(新羅) 조정의 자객인 염장(閻長)에게 암살되어 청해진(淸海鎭)이 염장(閻長)에게 장악(掌握)되었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公과 7학사(七學士)들은 배 안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청해진(淸海鎭)으로 가면 망명자 신분으로써 무슨 변고가 있을지 몰라 장보고(張保皐)가 설치한 제2 군진(軍陣)인 당성진(唐城鎭), 지금의 화성 남양만(南陽灣)과 아산만(牙山灣)으로 상륙을 결정한다.

신라(新羅)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年) 7年인 서기 846年경에 도시조(都始祖)와 7학사(七學士) 일행들은 당성진(唐城鎭)이 있는 아산(牙山)만 상류(上流), 지금의 평택시(平澤市) 팽성(彭城)에 도착, 정착(定着)하여 임팔급공이 평택임씨의 도시조가 되었다.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公과 그 일행이 신라(新羅)의 당성진(唐城鎭) 상류인 아산(牙山) 상류에 정착(定着)하면서 뗏집을 지어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생활하였다는 기록은 팔학사(八學士) 중 강릉유씨(江陵劉氏) 시조(始祖)인 문양공(文襄公) 유전(劉荃)이 지은 시에 나타나 있으며 팽성에 일곱메 집이란 지명이 남아있는 것이 이를 증명하여 준다.



2) 도시조(都始祖) 諱 팔급(八及)公과 동도 사적 : 평택 농성(農城)

도시조가 당성진에 도착하여 팽성(평택의 옛지명)에 터전을 잡은 사적으로는 당시 축성한 것으로 농성(農城)이 있다. 농성은 행정상으로 지금의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산 41-10(平澤市 彭城邑 安定里)에 소재(所在)하며 면적은 약 14,900㎡이며 경기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된 토성(土城)이다. 지난 1998년 평택시(平澤市)에서 수원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하였던 농성(農城) 유적(遺蹟)조사 보고서에 임씨(林氏)의 동도시조(東渡始祖) 팔급(八及)公이 중국에서 동도(東渡)하여 정착했다는 고증을 얻었다. 이 토성은 1872년 평택 지방지도에 기록된 모습처럼 소규모의 원형 토성이었으나 발굴 조사 이후 이를 수원시에서 복원하면서 원형이 변형되어 면적이 커지고 모양이 타원형이 되었다.(사진 참조)

전국임씨(全國林氏) 중앙회에서는 충절공(忠節公) 임팔급공의 동상을 농성 밖에 설치하고 2004년 3월 18일 2,000여 명의 전국임씨(全國林氏) 종친(宗親)들이 모여 성대한 제막식을 가졌다.

3) 도시조 팔급공의 설단 연혁

도시조의 묘소는 유실되어 없으므로 평택임씨 대종회에서는 1924년(甲子)년에 평택임씨(平澤林氏) 족보 갑자보(甲子譜2권) 편찬 사업을 마치고 남은 수익금으로 서울시 종로구 필운동 89-1의 대지(垈地) 120평을 구입하여 종약소(宗約所)를 개설하고 임씨(林氏) 도시조(都始祖) 諱 팔급(八及)公의 제단(祭壇)을 설단(設壇)하고 비(碑)를 건립(建立)하여 매년 음력 3월 3일 춘계 제향(祭享)과 9월 9일 추계 제향(祭享)을 40여 년간 봉행하였다.

그러던 중 대종회 임원(任員) 몇 분이 이들 땅을 매각하여 일부를 사용하고 대토로 서울 세검정 밖의 복숭아 밭 몇 백 평을 싼 값에 매입하여 유지하려 했으나 이사회의 자금 운용 실패로 비(碑)와 제단(祭壇)이 방치되어 유실될 위기에 있었다.

이에 1966년 2월 20일에 청양(靑陽)의 참의공(參議公)파 종친(宗親)분들이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화암리 299로 천단(遷壇)하였다. 그러나 제단(祭壇)이 너무 초라하여 1980년 단석(壇石)과 상석(床石)을 일부 입석하고 임씨(林氏) 도시조(都始祖) 諱 팔급(八及)公 제단(祭壇)을 중수(重修)하여 매년 음력 3월 3일에 평택임씨(平澤林氏) 참의공(參議公)파 주관으로 전국의 임씨(林氏)들이 참여하여 제향(祭享)을 받들고 있다.


4) 충정공이전 상계조상님과 사적

□ 1世祖 : 충절공(忠節公) 諱 팔급(八及)

도시조(都始祖) 諱 팔급(八及)은 당(唐)나라 말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다 간신(奸臣)들에게 참소(讒訴)되어 7학사(七學士) 일행(一行)을 이끌고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신라(新羅) 문성왕(文聖조 839~857年)시절인 서기 846年경에 망명(亡命)하여 평택농성(平澤農城)에 정착(定着)하였다. 신라(新羅) 말에 조정으로부터 이부상서(吏部尙書) 벼슬을 제수(除授)받았다. 장보고(張保皐) 사후(死後)에 신라(新羅)와 당(唐)나라 간의 해상무역(海上貿易)이 중단되자 남해안(南海岸)과 서해안(西海岸)의 해상호족(海上豪族)들과 연계(連繫)하여 중개무역(仲介貿易)을 시도했다. 바로 해상무역(海上貿易)을 활성화(活性化)하여 재력(財方)을 쌓아 평택농성(平澤農城)를 건립(建立)하였다. 그리고 천안(天安),청주(淸州),진천(鎭川) 지방(地方) 등 중부지방(中部地方)으로 세력(勢方)을 확장(擴張)하여 재력(財力과 군진(軍陳)을 갖춘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강력한 호족세력(豪族勢方)으로 성장(成長)하여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건국(建國)할 때 중추적인 역할(役割)을 하였다. 한국 임씨(韓國 林氏)의 세력 기반(基盤)을 마련하였다. 시호(諡號)는 충절공(忠節公)이며 묘소(墓所)는 팽성읍(彭城邑) 신대리(新垈里) 산 23-5에 전국 임씨종친회에서 조성하였고,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복주김씨(福州金氏)이다. 한국 임씨(林氏)의 도시조(都始祖)가 되는 분이다.
묘갈명(墓碣銘)은 종손(宗孫) 충숙공(忠肅公)이 쓰셨다. 子: 양저(良貯), 양연(良硯)

  □ 2世祖.  태사공(太師公) 諱 양저(良貯)

도시조(都始祖) 諱 팔급(八及)公의 첫째 아들이자 평택농성 성주(平澤農城城主)로 신라(新羅)조에 출사(出師)하여 태사(太師)와 중량장(重量將)에서 상장군(上將軍)을 역임(歷任)하였다. 덕(德)이 있는 재상(幸相)으로 충직(忠直)의 절개(節槪)가 높아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年)이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에게 귀부(歸附) 하고자 할 때 군주(君主)의 도리(道理)가 아니라고 직간(直諫)하여 경순왕(敬順王)의 노여움을 사 선산(善山)으로 유배되어 생애(生涯)를 마쳤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이고 묘소는 선산(善山) 야성에 있다고 전한다. 子: 무(碔), 적여(積璵), 상난(湘援)
 
 □ 2세조 청주공(淸州公) 諱 양연 (良硯)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公의 둘째 아드님이자 청주호족(淸州豪族) 세력으로 후삼국(後三國)시대 청주(淸州)가 箕萱(기훤)의 지배(支配)하에 있다가 태봉국(泰封國)인 궁예(弓裔)의 휘하(麾下)로 귀속(歸屬)되어 활동(活動)하셨다. 918年 궁예(弓裔)의 부하(部下)로 있던 왕건(王建)이 궁예(弓裔)를 죽이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켜 고려(高麗)를 개국(開國)하자 궁예(弓裔) 정권(政權)의 순군부(徇軍部) 이직(吏職)에 계시던 아드님이신 임춘길(林春吉)公이 태봉국(泰封國)의 도성(都城)인 철원(鐵原)에서 청주세력(淸州勢力)들을 모아 반란(反亂)을 일으켰으나 복지겸(卜智謙)의 밀고(密告)로 발각되어 왕건(王建)에게 처형(處刑) 당하였다. 평택임씨(平澤林氏) 구전설화(口傳說話)에 작은 집으로 전해온다.
子 임춘길(林春吉)

□ 3世組 충열공(忠烈公)諱 무(碔)

평택농성호족(平澤農城豪族)이며 태사공(太師公) 諱 양저(良貯)의 첫째 아들로 평택호족세력(平澤豪族勢力)이자 한찬(漢讚)으로 고려건국(高麗建國)에 功을 세워 태조 원년(太祖 元年 918年) 순군부령(徇軍部令)으로 임명(任命)되었다. 자(字)는 명필(明弼)이며 시호(諡號)는 충열공(忠烈公)을 하사(下賜)받았다. 또한 따님은 왕건(王建)의 비(妃) 숙목부인 임씨(潚穆夫人 林氏)이며 신명왕후(神明王后)로 추존되었다. 신명왕후(神明王后) 소생(所生)의 원녕태자(元寧太子)가 있으며 충열공(忠烈公)은 원녕태자(元寧太子)의 외조부(外祖父)가 되는 분이며 後에 고려(高麗)의 사심관(事審官) 제도인 팽성백(彭城伯)에 봉해졌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개성왕씨(開城王氏)이다.
子 女 왕건(王建)의 비(妃) 숙목부인 임씨(潚穆夫人 林氏)

□ 3세조 시랑공(待郞公) 諱 적여(積璵)

평택농성호족(平澤農城豪族)이며 태사공(太師公) 諱 양저(良貯)公의 둘째 아들로 태조원년(太祖元年 918年) 태조(太祖)가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킨 후 조정(朝延)을 개편(改編)하였을 때 사무(事務)에 통달(通達)하고 공직(公職)에 종사(從事)에 충실하고 사무(事務)를 민첩(敏捷)하고 진실(眞實)되게 처리하여 알찬(閼粲)직에서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제수(除授)받았다.
子 : 임정(林程)



□ 3세조 도항공(都航公) 諱 상난(湘煖)

평택농성호족(平澤農城豪族)이며 태사공(太師公) 諱 양저(良貯)公의 셋째 아들로 태조원년(太祖元年 918年) 태조(太祖)가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킨 후 조정(朝延)을 개편(改編)하였을 때,도항사향(都航司鄕)을 제수(除授)받았다. 子 : 임엄(林儼), 임식(林寔)



□ 3세조 이직공(吏職公) 諱 춘길(春吉 ~928年)

구전(口傳)으로 내려온 동시대(同時代)에 팽성(彭城)의 농성(農城)과 함께 축성한 청주(淸州) 정북동토성(井北洞土城) 성주(城主)인 팔급공의 둘째 아들 諱 양연(良硯)의 아들로 청주 호족세력(淸州豪族勢力)이자 태봉국(泰封國)의 궁예(弓裔〜918年)휘하의 순군부(徇軍部) 이직(吏職) 자리에 있었다. 고려태조(高麗太祖 877〜943) 왕건(王建)이 궁예(弓裔 〜918年)를 제거(除去)하고 즉위(卽位)하자 반발(反撥)하여 반란(反亂)을 일으키고 태조(太祖) 서기 918年 9月 같은 청주(淸州) 세력(勢力)들인 배총규(悤裴規) 계천(季川: 전남 장흥)사람 강길(康吉) 아차귀(阿次貴) 매곡(味谷) 충북 회인 사람 경종(景琮) 등과 함께 청주(淸州)로 도망하고자 하였으나 복지겸(卜智謙)이 이 사실을 태조(太祖)에게 밀고(密告)함으로써 잡히었다. 이에 청주(淸州)인 순군낭중(徇軍郎中) 현율(玄律)과 경종의 매형(妹兄)은 후백제(後百濟)와의 접경(接境)지대인 매곡성주(昧谷城主) 공직(龔直)임을 들어 이들을 살려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 염상(廉湘)이 반대(反對)하여 결국(結局) 928年에 죽임을 당하였다.

□ 4世組 충숙공(忠肅公) 諱 희(禧)

평택농성호족(平澤農城豪族)인 대광(大匡) 휘 무(碔 字 明弼)公의 첫째 아들로 진주(鎭州) 호족세력(豪族勢力)이자 파진찬(波珍湌)으로 태조원년(太祖元年 918年) 병부령(兵部令)에 임명(任命)되었다. 충숙공(忠肅公)의 딸은 2대(代) 혜종(惠宗)의 정비(正妃) 의화왕후(義和王后)로 흥화군(興化君)과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 정혜공주(貞惠公主)를 낳았다. 충숙공(忠肅公)은 고려(高麗) 2代 王인 혜종(惠宗)의 정비(正妃) 의화왕후(義和王后) 임씨(林氏)의 아버지다. 고려태조(高麗太祖) 때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삼한벽상(三韓壁上)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르고 흥화부원군(興化府院君)에 봉해졌다. 고려(高麗)의 사심관(事審官) 제도인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졌으며 시호(諡號)는 충숙공(忠肅公)을 하사(下賜) 받았다. 따님인 의화왕후(義和王后) 소생(所生)의 흥화군(興化君)과 경화궁 부인(慶化宮 夫人) 그리고 정혜공주(貞惠公主)의 외조부(外祖父)가 되는 분이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여흥송씨(驪興宋氏)고 묘소(基所)는 개성남산(開城南山)에 있으며 묘갈명(墓碣銘)은 후손 충정공(忠貞公) 언수(彦修)가 썼다. 子 : 임면(林冕) 
女 : 고려(高麗) 2代王인 혜종(惠宗)의 왕비(王妃) 의화왕후(義和王后)
수원백씨(水原白氏) 중시조 백창직(白昌稷)과 혼인 한 정경부인 임씨
 

□ 4世祖 :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 諱 언(彦)

평택농성호족(平澤農城豪族) 대광(大匡) 諱 무(碔,字 明弼)公의 둘째 아들로 천안호족(天安豪族)으로 신라(新羅) 조정(朝延)에 계시다가 927年 4月 강주도독(康州都督) 왕봉규(王逢規)의 신라(新羅) 사신(使臣)으로 927年에 당(唐)나라에 고려사신(高麗使臣)으로 파견(派遺)되어 다녀왔다. 같은 해 10月에 다시 고려태조(高麗太祖)를 위하여 당(唐)나라에 파견(派遺)되었는데 이처럼 여러 차례 당(唐)나라에 사신(使臣)으로 파견(派遺) 된 것으로 보아 유학(儒學)과 한학(漢學)에 조예(造詣)가 깊은 분으로 後에 천안태수(天安太守 928年)로 임명(任命)되었다. 태조(太祖) 왕건은 자신을 보필(輔弼)할 문사(文師) 층의 지원(支援)을 얻기 위하여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 諱 언(彦)公의 딸인 천안부원부인 임씨(天安府院夫人 林氏)와 혼인을 맺게 된다. 諱 언(彦)은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의 비(妃) 천안부원부인 임씨(天安府院夫人 林氏)의 아버지로 왕건(王建)의 장인(丈人)이고 천안낭군(天安郞君) 효성태자(孝成太子)와 효지태자(孝祗太子)의 외조부(外祖父)가 되는 분이다. 女 : 왕건의 비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 임씨(林氏)

□ 4세조 : 광평낭중공(廣評郞中公) 諱 식(寔)

평택농성호족(平澤農城豪族) 세력이자 고려개국(高麗開國) 공신(功臣)인 3세조 도항사향(都航司鄕)公 諱 상난(湘煖)公의 둘째 아들로 태조원년(太祖元年)(918年) 왕건(王建)이 궁예(弓裔)를 제거하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킨 후 조정(朝廷)을 개편(改編)하였을 때 한신일(韓申一)과 함께 광평낭중(廣評郞中)에 임명(任命)되었다.  

□ 5世祖: 시중공(侍中分) 諱 면(冕)

충숙공(忠肅公) 諱 희(禧)公의 아들이며 고려조(高麗朝)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장군(上將軍) 동평장사(同平章事)의 관직에 올랐다. 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평양조씨(平壤趙氏)와 정경부인(貞敬夫人) 초계정씨(草溪鄭氏)이다.

□ 6世祖 : 시금위공(侍禁衛公) 諱 득우(得雨)

시중공(待中公) 諱 면(冕)公의 아들로 고려조(高麗朝)에서 시금위(侍禁衛) 시립(侍立) 금시재(禁侍帝)의 관직에 올랐다. 配位는 개성왕씨(開城王氏)이며 父는 윤(倫)이다. 묘는 용인(龍仁) 땅 대치(大峙)에 있으며 현 순창임씨(淳昌林氏) 시조다. 子 : 몽주(夢周), 몽정(夢貞), 몽상(夢尙)  

□ 7世祖 : 충선공(忠宣公) 諱 몽주(夢周)

시금위(侍禁衛)公 諱 득우(得雨)의 아들로 충선공(忠宣公)의 號는 재(齋)이고 諱 몽주(夢周)이며 고려조(高麗朝)에서 평찰품사(評察品事)의 관직에 오르고 형제(兄弟)로는 몽정(夢貞),몽상(夢尙)이 있으며 8명의 아들을 두었고 모두 사심관(事審官) 제도인 군(君)에 봉(封)해졌다.
장남 견미(見美)는 평택군(平澤君)
차남 세미(世美)는 소양군(昭陽君)
셋째 수미(秀美)는 진천군(鎭川君)
넷째 의미(義美)는 선산군(善山君)
다섯째 인미(仁美)는 나주군(羅州君)
여섯째 성미(成美)는 상주군(尙州君)
일곱째 자미(自美)는 부안군(扶安君)
여덟째 계미(季美)는 성산군(星山君)으로 여덟 명의 아들을 두고 모두 군(君)으로 봉작하여 여러 관조로 분가(分家)하였다.
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풍천임씨(豊川任氏)이다. 墓는 아산(牙山) 구월동(九月洞)에 있으며 시호(諡號)는 충선공(忠宣公)이며 현 예천임씨(醴泉林氏)의 관조이다.

□ 8世祖 평택군(平澤君) 諱 견미(見美)

□ 9世祖 병부시랑(兵部侍郞) 諱 색(塞)

□ 10世祖 평찰사(評蔡事) 諱 만옥(萬玉)

□ 11世祖 통학권장(通學券章) 諱 희윤(喜胤)

□ 12世祖 삼중대광평장사(三重大匡平章事) 諱 연(璉〉

□ 13世祖 문하시중(門下侍中) 諱 정(禎)

□ 14世祖 좌찬성(左贊成) 諱 완(玩)

충정공(忠貞公) 諱 언수(彦脩)公의 아버지이며 팔급(八及)公 동도(東渡) 이후 누대(累代)를 걸쳐 충정공(忠貞公) 諱 언수(彦脩)公에 이르기까지 평택임씨는 번성을 누렸다.

□ 15세조 중시조 : 충정공(忠貞公) 諱 언수(彦脩)公

평택임씨(平澤林氏) 중시조(中始祖) 충정공(忠貞公) 諱 언수(彦脩)公은 고려 1307年에 사마의 문과(司馬懿 文科)에 급제(及第)하고 벽상삼한 삼중대광 태위찬성사 문하시중 평장사(壁上三韓 三重大匡 太尉贊成事 門下侍中平章事)에 아드님 유공(遺功)으로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封)해졌다.
충정공(忠貞公) 諱 언수(彦脩 1,294〜1,384)公은 아들인 6미(六味)孫인데 여기에서 두 번째 분관이 이루어졌다.

우왕 14年(禑王 32代 1,388年)에 온 가문(家門) 사람들이 무진화변(戊辰禍變)의 참화(慘禍)를 입어 개경(開京)에서 뿔뿔이 흩어져 나와 성미(成味),견미(堅味),제미(齊味), 세미(世味),자미(自味),의미(藙味) 등의 후손들이 모두 평택관(平澤貫)으로 이어왔으나 서로 연락이 두절 되었다.

1,764년 처음으로 평택임씨(平澤林氏) 충정공(忠貞公)系가 족보를 만들면서 첫째 아들 충간공(忠簡公)系를 중심으로 나주임씨(羅州林氏)들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임 씨(林氏)들이 동도시조(東渡始祖) 諱 팔급(八及)公을 시조(始祖)로 하여 평택관(平澤貫)을 본(本)으로 하고 범 임씨(凡 林氏)들을 통합하여 족보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계대(系代)가 차이 나고 교통이 불편하여 연락이 안 되고 자금 문제까지 겹쳐 충정공(忠貞公)系의 충간공(忠簡公) 후손들만 평택임씨(平澤林氏)로 관(貫)을 만들어 평택임씨(平澤林氏) 족보(族譜) 갑신보(甲申譜)를 발간(發刊)하였다.
이후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系와 전객령계(典客令系)가 평택임씨(平澤林氏)로 관(貢)을 만들고 들어오지 못한 나머지 계파(系派)는 그 후 거주지와 지역 그리고 조상의 벼슬 이름을 따서 관(貫)으로 하여 20여 개가 넘는 관(貫)이 만들어져 분관(分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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